경의선 도로 출입사무소서 출경 수속
첫 관광지 박연폭포…추운날씨에 꽁꽁
'13첩반상' 점심 먹고 선죽교 등 구경
 
금강산처럼 다양한 콘텐츠 개발해야
 
 
박연폭포. 황진이가 화담과 자신, 그리고 박연폭포를 송도 3절로 일컬어 더 유명하다.
선죽교. 고려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피습당한 돌다리.
선죽교 맞은편 표충비.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인데, 엉뚱하게 거북이의 코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여자는 왼쪽 거북이, 남자는 오른쪽 거북이) 거북이의 콧등이 맨질맨질하다.
신현수 인천연대 전 상임대표 개성여행기
 
이글은 신현수 평화와참여로가는 인천연대 전 상임대표의 개성 여행기다. 현직 고교 국어과 교사인 신 전 대표는 당일로 다녀온 개성여행을 통해 더 많은 교류가 전제된다면 통일이 멀지 않았음을 솔직히 밝혔다. 여행을 통해 느낀 감정들을 인천연대 홈페이지(www.ispp.or.kr)에 올린 글을 신 전 대표의 동의하에 지면에게 게재한다.


경의선 도로 출입사무소 입구.
나는 지난 2008년 2월 3일, 당일치기 개성 관광을 다녀왔다.
지난해 12월 5일부터 시작된 개성관광은 이제 꼭 한달 남짓 지났는데, 북쪽에서 남측 사람들에게 관광이 허락된 곳 중 내가 안 가본 유일한 지역이라 꼭 가보고 싶었다. 신문 보도를 보니 개성관광의 인기가 좋아 이미 3월까지의 예약이 대부분 완료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잘된 일이다.
그런데 여행을 앞두고 한가지 고민이 있었다. 출입사무소까지 가는 버스가 너무 일찍 출발하는 것이었다. 새벽 5시 50분에 현대 계동사옥 앞에서 모인다는 데 인천에서 그 시간에 거기까지 갈 수 있는 대중교통편은 없었다. 난 그동안 마치 내가 서울사람인양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온 것이 부끄러웠다. 난 인천 '지방' 사람이 확실히 맞다. 하는 수 없이 함께 가기로 한 선배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번 여행은 1박 2일 여행이 돼버렸고, 당연히 전날 퍼먹은 술 때문에 개성 관광을 하는 하루 종일 고통을 당했으니, 뻔한 수순이었다.

 
개성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잠이나 더 잤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지만, 또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 새벽 4시 반쯤에 일어나 택시를 타고 현대 계동 사옥 앞으로 갔다. 5시 53분에 출발해서 6시 10분에 마포구청역 앞에서 사람들을 한번 더 태우고, 7시 약간 넘어서 경의선 도로 출입 사무소에 도착했다. 바로 이 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해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다녀올 때 달렸던 길. 한번쯤 감회에 젖을 법도 하건만 작취미성(昨醉未醒)이라, 난 버스 안에서 오직 실수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 이었다.
현대 아산 직원에게 여행에 관한 약간의 설명을 듣고, 휴대폰을 맡기고, 7시 30분부터 나라를 넘어가는 '출국' 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가는 '출경' 수속을 밟았다. 출경이라, 금강산 갈 때도 느낀 사실이지만, 고심 끝에 잘 만든 말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정말로 남과 북의 경계를 넘어 북의 경계로 들어가는 '입경'수속을 밟았다. 수속이래 봐야 짐 검사와 이미 제출된 사진과 관광증을 대조해 보는 일. 북쪽에서 일하는 현대 아산 직원들이 모두 나와 반갑게 맞이 해준다. 버스는 개성시 외곽을 거쳐 개성시내로 들어간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주민들이 길에 많이 나와있다.

관음사 근처에 있는 건물앞에 세워진 팻말. 출입금지 대신 쓰인 '섯!'이란 글자가 재미있다.
개성 평양 간 도로를 거쳐 9시 30분쯤에 박연폭포에 도착했다. 개성시내에서27km 떨어진 곳이다.
박연폭포는 꽁꽁 얼어붙었다. 웅장한 폭포소리와 함께 시원스레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를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겨울은 겨울 나름대로 폭포의 정취가 있다. 꽁꽁 언 겨울이라 밑에까지 내려가 볼 수도 있다. 한반도는 사계절이 있어 불편하기도 하지만, 계절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 때문에 사실 우리는 네개의 자연을 가진 셈이다. 그러니 박연폭포도 당연히 계절마다 모두 다른 4개의 박연폭포가 있다. 난 이제 겨울 박연폭포 하나만 보았을 뿐이니, 봄·여름·가을 세 번은 더 개성에 와야 한다.
박연폭포는 우리나라 3대 폭포로 유명한데,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설악산의 대승폭포, 그리고 바로 이 박연폭포다.
박연이란 폭포이름은 폭포가 떨어지는 바로 위에 있는 못의 둘레가 마치 바가지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황진이가 화담과 자신과 박연폭포를 송도 3절로 일컬어 더 유명하다.
폭포 맞은편에 '범사정(泛?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범'자는 간신히 읽었는데 '사'자가 까다로웠다. 생각해보니 관동별곡에 나오는 글자였다. '뗏목 사'자였다. 관동별곡의 바로 이 부분 "仙션?사랄 띄워 내여 斗두牛우로 向향하살가,仙션人인을 차자려 丹단穴혈의 머므살가." 에서 '선사, 신선이 타는 뗏목', 선생도 가르치고도 모르는데, 아이들은 고전문학이 얼마나 어려울까?
고려시대 때 쌓은 대흥 산성 북문을 지나 관음사로 갔다. 절을 가기 전, 무슨 용도의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간단명료한 팻말이 보여 함께 간 조재도 형과 한참을 웃었다. 퀴즈를 내도 좋을 것 같다. 출입금지를 우리말 한 글자로 줄이면? 정답은 '섯'.
관음사로 오르는 숲속 바위 위에 쌓인 눈이 겨울의 정취를 더욱 깊게 한다.
관음사 은행나무를 지나 대웅전에 도착했다. 북쪽의 스님은 우리와 복장과 두발형태가 다르다. 대웅전 오른쪽 관음굴 속의 관세음보살 좌상 앞에 켜 놓은 촛불이 관음사의 성스런 분위기를 더하고, 대웅전 앞에 얌전히 서있는 석탑은 고졸하다

 
개성 남대문.
박연폭포를 다보고 나서 11시 30분쯤 다시 버스에 올랐다.
개성시내 통일의 거리 등을 거쳐 점심을 먹기 위해 통일관과 민속여관으로 갔다. 내가 속한 3조는 민속여관이었다. 식당 문 앞에서 물수건을 나누어주는 풍경은 여전하다. 점심은 13첩 반상기를 먹었다. 13첩 반상기는 놋그릇에 담아야 제격이라고 한다. 맛도 맛이지만 13첩 반상기를 차려놓은 장면 자체가 눈길을 끌었다.
개성 남대문 북쪽에 위치한 개성민속여관은 조선시대 전통가옥단지를 여관으로 개조하여 1989년 개장하였다고 한다. 여관 안을 가로 질러 흐르는 실개천이 인상적이었다.
점심을 먹고 남대문을 지나 정몽주의 위패를 모신 숭양서원(崧陽)에 갔다. 남대문이라는 글씨는 선죽교의 비석과 아울러 모두 한석봉의 글씨라고 한다.
난 처음에 송양서원인 줄 알았는데 함께 간 친구 최성수 시인이 '숭'자'라고 한다. 그래도 명색이 한문선생이라 다르다. 다녀와서 한자사전을 찾아보니 '崧'자가 '우뚝 솟을 숭'자다. 숭양서원은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데, 정몽주의 집터에 정몽주의 충절과 서경덕의 학덕을 아울러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을 다 보고 나서 자남산 여관을 거쳐 선죽교로 갔다. 바로 저기가 자남산여관이로구나. 남북 간의 회의가 있을 때마다 언론에 자주 나오던 곳. 이제 자남산여관도 더 이상 관념이 아닌 곳이 되었다.
선죽교 맞은편에 세워 놓은 표충비로 갔다.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인데, 엉뚱하게 거북이의 코를 만지면 비는 게 이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여자는 왼쪽 거북이, 남자는 오른쪽 거북이)거북이의 콧등이 맨질맨질하다. 표충비를 다 보고나니 3시 30분쯤. 벌써 개성 관광이 끝나갈 시간이다.

개성관광의 마지막 코스인 고려박물관으로 갔다. 이 박물관 건물은 원래는 고려시대 때 지어진 성균관 건물인데, 이 건물을 이용하여 고려시대 유물 1000여점을 모아 박물관으로 꾸몄다. 그래서 박물관 안마당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들은 대부분 몇 백 년의 수령을 자랑한다. 고려시대 벽화가 인상적이었고, 조선시대 사고팔던 노비의 값이 눈길을 끌었다. 소 한 마리에 4백필인데, 15세 넘은 여자종은 120필, 남자종은 100필이다.
개성관광도 금강산처럼 2박 3일, 아니면 적어도 1박 2일은 돼야할 것 같다. 왕건왕릉과 공민왕릉, 영통사와 만월대, 첨성대는 보지도 못했다. 콘텐츠를 더 개발해서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오고 싶은 곳으로 만들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금강산 관광은 훌륭하다. 교예, 온천, 등산 등 콘텐츠가 풍부하다.
개성공업지구를 버스 안에서 둘러봤다. 노대통령이 방북 길에 차고 갔다는 로만손 시계 공장도 보이고, 귀로에 방문했다는 신원 에벤에셀도 보인다.
개성공업지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개성 넓은 벌판에 2단계 공사가 한창이다. 북이 개성을 공업지구로 개방한 것은 사실 대단한 결심이다. 북으로서는 휴전선이 개성 뒤로 물러앉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개성공업지구의 성공은 남과 북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난관이 없을 수 없겠으나, 어려움을 현명하고 슬기롭게 극복하여 남과 북의 모범적인 경제 협력 모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꾸 왔다 갔다 하고, 그래서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하루빨리 벗어야 한다.
우리 민족은 능력있는 민족이다. 중국과 일본 등 강대국 사이에서 어쨌든 멸망하지 않고 몇 천 년을 버텨왔다. 어쨌든 세계에서 미국과 대거리를 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 한반도 북쪽이고, 어쨌든 물려받은 아무런 자원도 없이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니 11위니 하게 된 곳이 한반도 남쪽이다.

 
임진강 통일의 다리를 지난 버스는 저녁 7시경 새벽 출발한 곳에다 우리를 내려놓았다.
현대아산빌딩은 일요일인데도 빌딩 여기저기 불이 켜져 있다. 난 현대 재벌과 아무 관계도 없지만 개인적으로 현대아산의 이 북쪽 관광 사업만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 사업은 단순한 관광사업이 아니다. 통일을 앞당기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사업이다. 더구나 현대아산으로서는 회장의 목숨까지 바친 일 아닌가? 4월에는 비로봉 등의 금강산 내금강, 5월에는 백두산 관광도 시작된다고 하니, 이 관광들도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인천 강화에서 개성으로 놓인 다리를 건너 개성관광을 할 수 있는 날도 오겠지. 그러면 전날부터 집을 떠나지 않아도 되겠지. 남의 집 신세를 지다 술 퍼먹고, 정작 구경은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안 해도 되겠지.

/정리=홍신영기자 blog.itimes.co.kr/cubsh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