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막걸리를 받아오라는 어른의 심부름은 참 신나는 일이었다. 양조장의 시큼한 술 찌꺼기의 향내도 좋으려니와 몰래 마셔보는 비밀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술의 구력이 이렇듯 오래된 필자가 요즘 들어 술을 많이 자제하는 편인데, 이유는 필자의 사주에서 간(肝)에 해당하는 木이 지난 甲申, 乙酉년이 金氣가 왕성한 해로 바로 肝(木)을 극하기 때문에 유독 피곤을 많이 느껴서다. 그러면서도 워낙 술을 좋아하다보니 웬만한 술자리는 빠지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술을 마시는 일에 대해 ‘세세생생 지혜의 종자를 끊어버리고, 죽어서는 똥물 지옥에 빠진다’고 준엄한 경고를 내리셨다. 부처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필자로, 끊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더 마실 기회가 잦아지고,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해 술을 마실라면 늘 걱정이 되었다.
동의보감 주문(酒門)에 보면 ‘술은 혈맥을 유통시키고 위로 오르는 성질이 있으며, 조금 마시면 정신을 강화하고 지나치면 수명을 던다. 크게 덥고 크게 독하여 살충 작용을 하며 전염병을 예방하고 종기 등을 씻는데 쓴다. 초독(草毒), 채독(菜毒)을 없앤다…’고 되어있다. 잘 쓰면 약이요, 못쓰면 독이 되는 이 술을 잘 쓰기란 참으로 어렵다.
현대인은 두려움, 불안 등으로 얽혀진 채, 무한히 고독할 수밖에 없다. 오직 술만이 그것을 잊게 해주는 것으로, 무아지경을 맛보기 위해 많은 손실을 감수해 가며 술을 찾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나라고 하는 것이 남과의 상대 속에서 살아야 하는 비교 자체가 괴로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급격한 도회문명 속에 교묘하게 발달되어 가는 비교하는 습관의 에고는 독한 술의 힘을 빌려야 겨우 잠깐 괴로움을 잊게 하는 현대인에게는 유일한 피난처요, 휴식처가 된다. 나와 남의 비교란 어느 누구에게나 잠재적으로 깔려 있는 아킬레스건으로, ‘소위 남과 비교해서 내가 낫다, 못하다’하는 생각이 곧 비교 속의 우월이나 열등, 망상으로 이어져 마음을 침전하게 만든다. 비교는 결코 사랑일 수 없는 것임을 깊이 깨달을 때, 술의 필요는 저절로 없어지게 되고, 두뇌의 대화 아닌 가슴의 소통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비교를 전혀 하지 않는 자유스러운 영혼끼리의 대화에서 오는 황홀과 기쁨이 곧 술중에 술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