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뒤집듯 바뀐 계획…'난산'으로 이어지고


1966년 4월26일 첫 삽 뜬 2도크 공사
대통령 현장 시찰로 전면 도크화 선회
1968년·1970년 두 차례나 설계 변경
비용·기간 늘어나며 특혜 논란 일기도

1973년 9월20일 완공 후 담수작업
이듬해 4월15일 일본 화물선 첫 입항
다음 달 10일 월미도 갑거서 준공식
3만t급 대형 선박 신디호 내항 진입
▲ 월미도 갑거 준공식장 현장 입구에 세워진 '인천항 선거 준공' 기념 출입구./사진제공=1974년 5월18일, 대한뉴스 983호
▲ 월미도 갑거 준공식장 현장 입구에 세워진 '인천항 선거 준공' 기념 출입구./사진제공=1974년 5월18일, 대한뉴스 983호

앞의 제36화 말미에서 언급한 대로 인천항 제2도크 축조 공사는 내항 수역 전체를 도크화 하는 대공사로 바뀐다. 1970년 완공을 목표로 실제 1966년 4월26일에 첫 삽을 떴던 제2도크 축조공사는 당초보다 4년이 늦어진 1974년 5월10일에 완공되기에 이른다.

마침내 5만 톤짜리 큰 배가 인천항 부두에 와 닿게 된, 동양 최대의 이 매머드 갑문항 공사의 완공을 크게 보도하면서도 언론들은 “착공 이래 두 차례의 설계변경과 규모 확장, 시행착오에 따른 낭비, 적잖은 소문과 말썽으로 이어진 8년의 공사”라는 지적의 목소리를 섞는다.

당초 이 공사는 일제가 중단했던 제2도크를 중심으로 계획되었던 것인데, 공사 과정 중에 계획이 변경되면서 공기 연장, 비용 문제, 기술력에 따른 시행착오 문제, 그리고 특혜 시비 등이 불거져 이 같은 부정적 비판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천항의 입장에서 보면, 이 같은 결과가 결과적으로 득을 가져왔다고 해야 할는지 모른다. 아무튼 그 모든 '말썽'은 그 당시 우리 사회가 치밀한 계획 없이 앞으로, 앞으로 '밀어붙이고, 줄달음치기만'한 데 대한 대가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더구나 공사를 변경하게 된 단초를 보면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에 그 점을 짐작케 하는 기록이 있다.


인천항 제2도크 축조공사는 2번의 수정을 하게 되었는데 당초 제2도크 어귀에 축조하려던 갑거(閘渠)의 위치가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로 이동되었고 초기 2만 톤급의 선박을 접안하려 계획 세웠던 것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현장을 돌아보는 자리에서 일약 5만 톤급으로 계획 변경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확대된 수정 계획에 의해 진행된 인천항 제2도크 축조공사는 최종적으로 인천항 내 전면 도크화 공사로 확정되었다.


바로 이 문맥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급작한 공사 변경 이유가 곧 '대통령의 현장 시찰'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성공적인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으로 인한 산업화의 확대와 더불어 국제적으로도 선박의 대형화 추세가 인천항의 전면 도크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대역사(大役事), 국책사업이 이렇게 치밀한 계획과 원칙 없이 오락가락 시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제대로 된 건조물을 만들려면 설계가 끝난 뒤 이를 토대로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렇지만 인천항 선거의 확충 공사는 동아건설산업이 착공한 지 1년 후인 1967년 5월 도진종합설계에 7개월 일정으로 설계가 발주되었고, 이 해 9월 11일에 가서야 공사비와 공사 규모 등이 확정되었다. 공사의 기본 원칙이 철저하게 무시된 것이었다.

공사의 규모도 수차 확대, 조정되었다. 항만 확충 사업은 착공 당시만 해도 1935년 일제가 세운 계획과 비슷해 제1선거 옆에 별도로 제2선거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경인운하 건설에 대비해 운하 입구로 예정된 율도 부근에 운하의 이용 화물을 처리할 수 있는 제3선거를 만드는 방안도 병행해 검토되었다.

하지만 제2선거 건설 계획을 수립하던 도중, 정부는 내항 전체를 단일 선거로 만들기로 하고 갑문 위치도 월미도로 변경하였다. 규모도 2만 톤급과 8000 톤급 2기의 갑문 설치와 안벽 3820m를 70년 말까지 새로 축조하기로 하고 사업비를 62억 2500만 원으로 증액하였다.


인용문은 과거 인천일보 경제부 기자를 지냈던 고 김홍전(金洪田)의 저서 ‥경제 전문 기자가 본 인천경제사…의 일부분이다. 인천항 제2도크 축조공사는 이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졸속과 무계획이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이 같은 우여곡절은 1968년 5월에 1차 설계 변경에서부터 시작된다. 변경의 주요 골자는 2만t 갑거를 5만t으로, 8000t 갑문을 1만t으로 확장하는 것. 그러나 미국 PAE사(社)가 작성한, 이른바 롤링 게이트 갑문을, 설계의 하자를 들어 1970년 2월, 제작사인 한국기계가 성능 보장에 난색을 표하며 제작을 거부한다.

설계 수정을 거부한 PAE사(社)와의 갈등 끝에 1970년 7월, 이번에는 쏘그레아사와 르와브르 항만청이 합작한 프랑스 측에 설계를 맡긴다. 그러면서 정부는, 갑문 제작은 조선공사에 하도급하는 조건으로 동아건설과 일괄 발주 계약을 체결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설계비가 이중으로 들게 된 것이었다. 총공사비 역시 애초 증액해 세운 62억원에서 174억원으로 늘어나고, 공기(工期) 또한 1970년 완공 예정에서 1973년 12월 말로 늦추어진다.

▲ 1971년 11월8일 국회 건설위원회 인천축항 국정감사장에서 야당은 갑문 제작에서부터, 축조공사를 맡은 동아건설 등에 대한 특혜를 지적하며 '6대 의혹'을 주장했다는 1971년 11월9일자 조선일보 기사./사진제공=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
▲ 1971년 11월8일 국회 건설위원회 인천축항 국정감사장에서 야당은 갑문 제작에서부터, 축조공사를 맡은 동아건설 등에 대한 특혜를 지적하며 '6대 의혹'을 주장했다는 1971년 11월9일자 조선일보 기사./사진제공=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

공사에 따른 모든 '소문과 말썽'이 드러난 것은 1971년 11월8일, 국회 건설위원회에서였다. 당시 야당은 인천축항사무소에 대한 감사에서 갑문 제작을 굳이 부산에 소재한 조선공사에 하도급한 점, 부두 공사 중 240m 구간에 균열과 압출(壓出) 사고를 낸 동아건설에 끝끝내 공사를 맡긴 점 등은 엄청난 특혜라며 따진 것이다.

또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대한통운, 한진 등 두 업체에게만 준 이유를 캐물으며, 이 공사로 얻어지는 매립지는 물량장으로 사용되는 까닭에 향후 땅값이 시내 요지와 맞먹는 고가(高價)가 될 것임을 들어, 특정 민간자본에 맡겨 대지 소유권까지 준 사실 역시 그 이면에 흑막이 개재되어 있다며 몰아세운다.

실제 이 같은 민간업자의 공유수면매립에 따른 소유권 문제는 1969년 6월에 이미 건설부가 민간자본을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제2도크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부두(私設埠頭) 설립을 한진과 대한통운에만 허가했던 터였다.

▲ 중구 답동 사거리에서 펼쳐진 제2도크 준공식 기념 시민 퍼레이드. 당시 인천시는 제2도크 준공일인 5월10일을 기념해 인천시민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2권
▲ 중구 답동 사거리에서 펼쳐진 제2도크 준공식 기념 시민 퍼레이드. 당시 인천시는 제2도크 준공일인 5월10일을 기념해 인천시민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2권

대략적이나마 이것이 '비용의 낭비, 그리고 적잖은 소문과 말썽으로 이어진 8년 제2도크 공사'의 전모였다. 하지만 인천항 전면 도크화, “그것은 매우 슬기로운 착안이었다.”라는 ‥인천상공회의소90년사…의 평가대로 과정이야 어쨌든 '그 결과는 득이었던' 것 같다.

이런 곡절 끝에 1973년 9월20일, 완공된 인천항은 선박 입항을 위한 담수(湛水)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준공식 거행 약 한 달 전인 1974년 4월15일, 오전 10시15분, 인천 개항 이래 외국 선박으로는 최초로 1만2000t짜리 일본 화물선 규바마루가 입거한다. 이 배는 갑실(閘室)의 수위 조절을 위해 38분 동안 정지했다가 내항으로 들어와 11시17분에 제2부두에 닻을 내린다. 이 역사적인 장면을 당시 조선일보는 마치 실황을 중계하듯 소상히 보도하고 있다.

▲ 선거(船渠) 공사에 따른 갖가지 '소문과 말썽' 끝에 8년의 공사를 마치고 1974년 5월10일 월미도 현장에서 준공식이 거행되었음을 보도한 5월11일자 조선일보 기사. /사진제공=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
▲ 선거(船渠) 공사에 따른 갖가지 '소문과 말썽' 끝에 8년의 공사를 마치고 1974년 5월10일 월미도 현장에서 준공식이 거행되었음을 보도한 5월11일자 조선일보 기사. /사진제공=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
▲ 준공식 식장에 도열한 인천항 및 공사 관계자들./사진제공=1974년 5월18일, 대한뉴스 983호
▲ 준공식 식장에 도열한 인천항 및 공사 관계자들./사진제공=1974년 5월18일, 대한뉴스 983호
▲ 선거에 접안한 신디호./사진제공=1974년 5월18일, 대한뉴스 983호
▲ 선거에 접안한 신디호./사진제공=1974년 5월18일, 대한뉴스 983호

준공식은 1974년 5월10일에 박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관계 부처 장관과 해운, 건설업계, 기업인, 공사 관계자와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월미도 갑거 현장에서 거행된다. 이날 박 대통령이 컨트롤타워에 설치된 스위치를 누름으로써, 'YMCA건물 크기에 맞먹는 갑문이 7분간에 걸쳐 열린 후, 5만 톤급 갑실에 머물던 리베리아 선적(船籍) 3만 톤짜리 신디호가 두 척의 예인선에 끌려 내항에 진입한다.'

이로부터 인천항은 1980년대 수출 100억 불 달성까지 산업화 시대의 전초 기지로서 활약한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