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여름 창영초등학교 5학년생이던 필자는 여름방학과제를 올림픽 경기로 정했다. 선생님께서는 방학과제로 곤충이나 식물 채집 또는 각자 좋아하는 작품을 만들어 오라고 하셨다. 그해 7월19일부터 8월3일까지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열리고 있던 올림픽 대회 전적이 나온 신문기사를 오려 공책에 붙여서 '헬싱키 올림픽 성적표'라고 큰 글씨로 써서 제출했더니 뜻밖에도 방학과제 우수작 전시회에서 전교에서 1등인 특등상을 받았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20여명의 선수들을 핀란드까지 보낸 대한민국도 대단했지만 당시 모든 한국인들은 마라톤 대회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일장기를 달고 뛰었던 손기정 선수를 회상하면서 최윤칠 선수 등 한국선수가 메달을 딸 것으로 기대했다. 외과의사이셨던 선친께서는 집에서 여러가지 신문을 구독하셔서 올림픽 기사 스크랩으로 방학과제로 만들 수 있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신문기자가 되고 올림픽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1981년 독일의 바덴 바덴에서 열린 올림픽 총회에 88 서울올림픽 유치단 대표로 간 것도 투표권을 가진 IOC 위원들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깝게 많이 아는 사람으로 꼽혔기 때문이었다. 파리특파원 시절 체육단체를 대신해서 국제행사에 자주 참석하다보니 '대한체육회 특파원'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1978년 서울에서 열린 42회 세계사격대회 유치와 준비과정에서 IOC 위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한국에도 초청했던 인연이 있었다.

▶언론인으로서 외도에 가깝던 올림픽과의 인연은 서울올림픽 준비과정과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와 준비 참여로 자연히 연결되었다. 2007년 인천 아시안게임 유치위원장으로 인도의 뉴델리를 꺾고 유치에 성공했을 때부터 주경기장을 신축하지 말고 문학경기장을 쓰자는 간곡한 소망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으로 남아있다. 북한과의 화해를 그토록 희구하는 분들도 아시안게임을 통해 인천의 자원봉사자들과 응원단의 민족애가 폐막식에 평양의 최고위층 3인의 인천 '예방'을 실현시킨 것을 망각하고 있으면서 올림픽을 남북관계 개선의 매개체로 계속 쓰겠다는 의욕만 내비치고 있어서 답답하다.

▶남북접촉과 화해의 마당으로 쓰겠다던 도쿄올림픽은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반신불수 상태다. 내년 2월로 예정된 베이징 동계올림픽 역시 미국을 위시해 캐나다와 유럽 여러나라들이 불참을 숙고 중이고 개별 선수들을 통해서 신장 위구르 지역의 인권탄압과 인종 말살 정책에 항의하는 각가지 방안을 모색중이다. 1996년 제26회 미국 애틀랜타 대회 때부터 공동입장과 한반도기로 남북화해를 모색한지도 25년이 지났다.

/신용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