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조선독립만세” 목놓아 외치다

1883년 일제 강제 개항·조계 설정
항도 인천 62년간 쓰라린 비운 겪어

1945년 8월 미군 공군기 공습 사라지고
피난온 일본인·관동군 패잔병 보여

1945년 8월15일 12시 일왕 담화 시작
오후 6시 애관극장앞 사람들 쏟아져 나와
'태극기' '조선독립만세' 휘날리며 행진

일본 정부 9월초까지 잔류·치안유지 발표
기쁨은 잠시 …승전국 미군 3년간 인천 관할
9월8일 미군 입항 … 조선 군중들 환영 행진
일본 경찰, 이들에 발포 십여명 사상자 발생
마지막까지 조선인 살상 악행 저질러
▲ 태극기를 앞세우고 광복의 감격을 시가행진으로 마음껏 표출하는 시민들. /사진출처 =인천대관

1883년 일제에 의한 강제 개항과 조계 설정이 항도 인천의 운명이었다면, 인천은 더욱 길게 쓰라린 비운을 겪은 도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호경기에 도취한 일제는 '진취적인 노력으로 잠간 사이에 인천을 일본의 인천으로 만들었다'는 오만으로 거들먹거리며 인천의 한국인을 멸시하고 억눌렀기 때문이다. 거기에 인천에는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많은 일인들이 쏟아져 들어와 제집 안마당처럼 활보했던 것이다.

'더욱 길게 쓰라린 비운을 겪었다'고 말한 것은 인천이 일제에 당한 기간은 36년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천만은 개항 당년인 1883년부터, 저들에게 조계를 내어주고 떠밀려 산 때부터 계산해야 한다. 그 기간이 62년이니 다른 도시에 비해 근 27년이나 더 긴 쓰라림의 시간을 겪은 것이 아닌가.

그런 인천 사람들이었으니, 자신들에게 온 광복, 그 광복의 흥분과 감격은 어느 도시, 누구 가슴속의 그것보다도 크고 유별했었을 것이다. 그 같은 인천 사람의 감회를 사실 그대로 적은 임명방(林明芳, 1930~ ) 인하대 명예교수의 회고기 「인중 시절과 태극기에 대한 기억」의 부분을 읽어보자. 이 글은 1994년도 『황해문화』 겨울호에 실려 있다.

▲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항복하기 직전의 인천항 풍경이다. 부두는 여느 때와 같이 여전히 화물을 싣고 내리느라 분주한 모습이다./사진출처 =인천광역시사
▲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항복하기 직전의 인천항 풍경이다. 부두는 여느 때와 같이 여전히 화물을 싣고 내리느라 분주한 모습이다./사진출처 =인천광역시사

인천에서도 8월 들어서면서 이상한 일들이 눈에 띄게 되었다. 미군 공군기의 공습이 아주 사라진 것, 그리고 특히 만주에서 피난 온 듯한 일본인 행렬과 관동군 패잔병들의 출현 등이 그것이었다. 8월14일에는 다음날 정오에 일본 천황의 특별 방송이 있으리라는 소문이 퍼졌지만 시중에 라디오가 별로 없는 형편이라서 별로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고, 그래도 무슨 소식이라도 있나 궁금하여 집에서 라디오를 만져보았지만 부품이 고장 난 지 이미 오래였고 그래 할 수 없이 답동성당 신부 방에 그 시간이 되어 가보니 벌써 많은 교우들이 모여 있었다. 12시에 일왕의 담화가 시작되었지만 그곳의 라디오마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무슨 이야기인지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어서 궁금증만 더해 주었다. '항복이다. 아니다.'라고 야단들이었는데, 마침 2시경에 공습경보가 울리고 대공포 소리가 요란하게 인천 상공에 퍼지니 항복론은 쑥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저녁 6시쯤 경동 거리 애관극장 앞길에서 요란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기에 집을 뛰쳐나와 그리로 가본 나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애관극장 앞길을 메운 군중은 수백 명이 넘었는데, 이들이 언제 준비하였는지 '조선독립만세'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만세 삼창을 외치면서 내동 사거리를 지나 일본인들이 사는 동네로 행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물결 속에서 나는 삼촌이 말했던 태극기를 처음으로 보았다. 감추어 두었던 것인지 아니면 항복을 알고 난 후에 급조한 것인지는 몰라도 일왕 담화 몇 시간 후에 그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 죽은 듯이 일제 정치를 인내해 온, 바보스럽게만 보였던 조선인들에게 영원히 불타는 애국심과 민족정신이 엄연히 살아 있었다는 역사의 증언을 나는 그 순간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었고, 인중 생활로 인해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던 나는 그 후 여러 날 동안 잠을 잊은 채 그 흥분의 도가니 속에 빠지게 되었다.

▲ 광복을 맞아 태극기 휘날리는 인천시. 저 아래 쪽에 인천항이 내려다보인다./사진출처=인천대관
▲ 광복을 맞아 태극기 휘날리는 인천시. 저 아래 쪽에 인천항이 내려다보인다./사진출처=인천대관

당시의 필자 임 교수는 아직 학생 신분이었지만, 그 감정의 격류는 모든 인천 사람들 공통의 것이었을 것이다. 이를 인용하는 소이는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속에 감춘 채, 다 죽은 듯이 일제(日帝) 정치를 인내해 온, 바보스럽게만 보였던” 인천의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유별났을 그날의 감개를 한번 실감해 보자는 뜻에서이다.

광복은 이렇게 흥분과 감격 속에 찾아왔지만, 그러나 인천항은 여전히 인천시민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물러간 일제의 뒤를 이어 승전국 미군이 인천항을 관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미군은 인천항의 주인이나 다름없었고, 이제부터 3년을 더 기다려 개항 이래 65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야만 비로소 우리가 오롯이 항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1945년 9월 3일자 매일신보는 일본정부의 발표를 싣는다. 즉 '9월 7일에 미 육군 제24군 소속 부대가 경성지구에 진주한다. 이에 따라 인천항 동수도(東水道) 10리(哩) 지역에 있는 모든 선박 급(及) 함정은 9월 5일 18시 이후 운항이 금지되며, 이 지역에 있는 일본 군대는 9월 6일까지 철퇴할 것, 그리고 철퇴 지역 내에는 일본 경찰, 헌병 등의 요원을 주류(駐留)시켜 치안 유지에 임하게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인천항의 미군 진주는 1945년 9월 8일이었다. 이날 오후 2시경 미군 함정이 부두에 입항하자 환영하기 위해 행진하던 우리 군중에 대해 일본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피를 흘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곧 일본 군대 철퇴 지역 인천항에 주둔시킨 일본 경찰 병력의 행위였다.

▲ 1945년 10월 18일에 미군정 증원 부대 인력이 인천항에 도착한다는 신조선보 기사 내용이다. 증원군은 우리나라 각 도부군(道府郡)에 군정 관리로 임명될 것이라고 한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5년 10월 18일에 미군정 증원 부대 인력이 인천항에 도착한다는 신조선보 기사 내용이다. 증원군은 우리나라 각 도부군(道府郡)에 군정 관리로 임명될 것이라고 한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5년 11월 22일자 민중일보 기사다. 군정청은 한국 통치의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전국의 학교장, 경찰서장, 군수 등을 직접 임명했다. 기사 중에 인천중학교 길영희(吉瑛羲) 교장과 김영배(金英培) 인천시학무과장 발령 내용이 보인다./사진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5년 11월 22일자 민중일보 기사다. 군정청은 한국 통치의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전국의 학교장, 경찰서장, 군수 등을 직접 임명했다. 기사 중에 인천중학교 길영희(吉瑛羲) 교장과 김영배(金英培) 인천시학무과장 발령 내용이 보인다./사진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조선 해방의 사절로 지난 8일에 인천항에는 미국군의 입항이 시작되자 이날의 반가움을 참지 못하여 미군을 환영키 위하여 인천보안대원과 조선노동조합원 등이 질서정연하게 행렬을 지어 연합국기를 들고 행진하던 중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본인 경관대들이 발포하여 노동조합위원장인 권평근(權平根)이 가슴과 배에 탄환을 맞아 즉사하였고 보안대원 이석우(李錫雨)도 등허리에 탄환을 맞아 즉사하였다.

1945년 9월 12일자 매일신보 기사이다. 이밖에도 중경상자가 14명이나 발생하는 큰 사고였다. 물론 9월 5일에 미군은 민중 환영 등 의례적인 행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조선총독부 담화가 발표되었고, 미군 측의 지시라며 인천경찰서는 8일 당일에는 의사와 산파, 그리고 우편배달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시민들의 외출을 금지했던 것이다.

설혹 미군의 지시라 해도 부둣가를 향해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던' 시민들에게 발포하여 마지막까지 살상을 자행한 일제의 저의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흥분과 감격 속에 맞은 광복, 다시 찾았는가 싶었던 인천항은 이렇게 피를 흘리면서도, 온전하게 우리 손에 들어오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려야 했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