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깨비시장’이라 불리던 양키시장(송현자유시장)

어느 날 동네 친구가 은밀히 얘기했다. “약 구했다.” 그는 양키시장에서 '털 나는 미제 약'을 사 왔다. 고교시절, 우리는 스티브 매퀸이나 찰스 브론슨 같은 마초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배우들을 흠모했다. 스크린에 비친 그들의 근육질 몸매는 여드름 덕지덕지 난 고교 얄개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특히 넓은 가슴에 퍼진 털은 정말 부러웠다.

1학년 여름방학 때 매일 친구 집에 모여 가슴에 약을 발랐다. 며칠이 지나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 하나가 제안했다. “약 바르고 햇볕에 쏘여보자.” 그의 광합성 이론에 모두 동의하고 우리는 마당으로 나갔다. 약 바른 가슴을 드러내고 태양 쪽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그렇게 했지만 털의 싹수는커녕 얼굴만 시커멓게 그을렸다.

흔히 '송현동 100번지'라고 일컫는 곳에 양키시장이 있다. 1935년경 송현일용품시장으로 시작한 이 시장의 정식 이름은 '송현자유시장'이다. 인천 곳곳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우리나라 최대의 미제 물건 거래 시장이 되었다.

단속반이 나오면 물건 숨기기, 미리 싸 들고 달아나기, 진열 상품 국산품으로 바꿔치기 등 숨바꼭질 소동을 한 달에 대여섯 차례 했다. 장사꾼과 미제 물건이 도깨비처럼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도깨비시장'으로도 불렸다. 송현자유시장은 '동인천역 2030 역전 프로젝트' 사업 구역에 포함돼 철거된다. 양키시장 도깨비들도 이제 진짜 짐을 싸야 할 때가 왔다.

친구가 그때 사 왔던 약은 가슴에 털 나는 약이 아니라 발모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때 그 고교생들은 가슴 털은 고사하고 머리숱 듬성듬성한 중늙은이들이 되어버렸다. 양키시장은 인천인의 삶과 애환 그리고 추억을 품고 있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비록 낡고 허름하지만 '재생'을 통해 존치됐으면 하는 바람은 찰스 브론슨의 가슴 털처럼 허망한 꿈인가.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장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