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뒷산서 호기심에 툭
눈·손 잃고 사고입증까지
이후 공부 담 쌓고 싸움만
일용직 살며 피해 알려와
작년 말 법개정 추진 기뻐
▲ 폭발물 피해로 한 손과 한 쪽 눈을 잃은 김정호씨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경성대 사진학과 김문정 교수

#지뢰는 되고 불발탄은 안되고

“불발탄 피해자도 전쟁피해자입니다. 제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 폭발물 피해, 더 이상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정호(68)씨는 폭발물 피해로 한 손과 눈 하나를 잃었다. 그런데도 피해보상금은 고사하고 그에게 주어진 보상은 몇십만 원 남짓의 영세민 지원이 전부다. 지뢰 폭발로 입은 피해가 아닌 불발탄에 의한 피해라는 이유로 일 원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다.

“불발탄에 의한 피해라서 보상을 해줄 수 없다고 합니다. 이해하기 어렵더라고요. 지뢰 폭발 피해는 되고 불발탄은 안된다는 것이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죠. 보상 지원 체계가 이뤄질 당시, 피해 검증의 대부분이 인우 보증의 형태로 이뤄졌는데 저는 사고가 날 때 혼자였기 때문에 증명해 줄 사람이 전혀 없었죠. 어린 나이에 지뢰인지 불발탄인지 정신없는 사고 현장에서 스스로 사고를 입증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죠.“

사고 당시 김씨의 나이는 10살이었다. 뒷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발견한 폭발물을 호기심에 건드렸다가 피해를 입게 됐다. 부상 상태가 심각했던 김씨는 여러 곳의 미군 병원을 전전한 끝에 철원에서 인천까지 보내졌다.

“모두 죽을 거라 했죠. 마대 자루에 쌓여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다 인천까지 가게 됐는데 이때부터 제 인생도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채 회복되기도 전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다시 철원으로 돌아왔지만 김씨의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어렵사리 다시 돌아간 학교에서는 놀림거리가 됐고 상처받은 마음은 점점 비뚤어져만 갔다.

“아이들이 놀리니깐 놀리지 못하도록 힘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태권도며 축구며 운동을 하기 시작했죠. 허구한 날 친구들과 싸움박질이나 해 대는 통에 공부하고는 담을 쌓게 됐죠. 그때도 지금도 사고가 내 인생을 전부 망가뜨렸다고 생각했거든요.”

김씨의 불행은 성인이 된 뒤에도 이어졌다. 일용직 근로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때 어렵사리 가정을 꾸리게 됐고, 아내와 김씨 사이에 어여쁜 두 딸도 생겨났다. 두 딸은 김씨에게 힘든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두 딸은 서울에서 생활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못난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술잔을 기울여주던 딸들이었죠. 딸들은 저를 보며 항상 안쓰러워했어요. 얼마나 고통받는지 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을 테니까요. 시집도 못 간 두 딸은 끝내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죠. 아버지 걱정만 하다 세상을 떠난 딸들을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김씨는 두 딸을 여읜 뒤,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끊임없이 술을 마셔댔다. 김씨마저 삶의 끈을 놓으려던 때, 그에게 아내는 손을 내밀었다.

“아내가 아니었으면 이 세상 버티기 힘들었을 겁니다. 항상 고마운 사람이죠. 그리고 또 한 사람 평화나눔회 조재국 이사장님입니다. 그와 인연을 맺은 지는 10년이 됐고, 불발탄 피해자들의 보상과 권리 주장에 힘을 실어주신 분이었죠. 이때부터 광화문이며 청와대며 불발탄 피해를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습니다.”

김씨와 평화나눔회의 이러한 노력은 올해 결실을 맺게 됐다. 지난해 12월20일, 70년 만에 처음으로 지뢰뿐 아니라 일반 폭발물 피해자에 대해서도 정부 지원이 가능하도록 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기쁜 소식입니다. 저와 같은 피해자가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 정부가 적극 힘이 돼 줬으면 좋겠습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