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문화·예술·체육 새바람, 엄혹한 시기 희망되다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인천문화사 한 획

인천-서울 기차통학 학생 1920년 조직
은연중 일본인 학생 대항의식 바탕에

친목회 내부 문예부·제물포청년회
진종혁 인천 최초 문예지 '습작시대'
고유섭 우리나라 최초 고미술학자
임영균 인천 첫 치과의원·주간인천 발행
이길용 손기정 가슴 일장기 말소 주인공
장건식 은행원·군장성 … 조진만 대법원장
송건우 기자 … 고일 '인천석금' 발간

연극단체 칠면구락부 1926년 창단
진종혁 각색·원우전 무대장치
여배우 김석정·우운희 출연

희곡작가 함세덕·소설가 현덕
평론가 김동석·김도인 문예지 발행

이우구락부 국악애호 그룹
하상훈, 객주·인천상의 초대회장
이범진 청년계몽운동·서병훈 객주출신
최선경 세창양행 지배인 등 중심 인물

체육분야 핵심인물 곽상훈, 한용단 결성
야구·축구·정구팀 발족 … 구기 운동 선구자
유창호 인천 최초 무도관 세워 제자 키워
신태영 인천 권투계 대부, 첫 도장 설립

제물포 개항 이후, 활동한 각 방면 인천의 선구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야 할 것 같다. 다음 장(章)부터 제물포항의 변화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회에는 개항 후 이곳에서 활약한 문화예술, 체육 분야의 몇몇 인물들을 간략히 소개한다.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가 2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야구팀 한용단(漢勇團)을 결성하고 한편으로는 문예동인지를 펴내기도 했다. 문예부에는 정노풍(鄭盧風), 고유섭(高裕燮), 이상태(李相泰), 진종혁(秦宗赫), 임영균(林榮均), 조진만(趙鎭萬), 고 일(高逸) 등이 있었고, 뒤따라 따로 조직된 제물포청년회(濟物浦靑年會)―이길용(李吉用), 송건우(宋建雨), 장건식(張健植), 고 일―의 동인지 『제물포』와 함께 문학 수련의 길을 개척했다.

당시 통학생들이 서울로부터 도입한 새로운 사회풍조에 따라 인천에도 문화 활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원우전(元雨田), 정 암(鄭巖), 진종혁, 고 일, 임창복(林昌福), 한형택(韓亨澤), 임영균, 7명의 젊은이들이 연극 서클인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 그리고 하상훈(河相勳), 최선경(崔銑卿), 서병훈(徐丙薰), 이범진(李汎鎭) 등 국악동호인들이 고유문화 부흥을 위해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했다. 문예, 연극, 국악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이 시작되었으나 애호와 계몽의 역할을 했을 뿐 뛰어난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

근현대 인천 문화사에 있어 큰 획을 긋는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를 비롯해 제물포청년회의 문학 활동, 그리고 두 개의 연극과 음악단체, 곧 칠면구락부와 이우구락부에 대한 신태범 박사의 설명이다. 이 내용 역시 『개항 후 인천 풍경』에 실려 있다. 고 일 선생은 당신이 직접 소속했던 단체였던 까닭에 더욱 재미있는 일화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으나 내용이 방대하여 신 박사의 글을 인용했다.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는 인천서 서울로 기차를 이용해 통학하는 한국인 학생들이 1920년에 조직한 단체였다. 명칭 그대로 통학생들 간 친목을 도모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은연중에 일인 학생들에게 대한 대항 의식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러면서 친목회 내에 문예부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신 박사의 표현대로 '서울의 신문화를 도입해' 인천에서 실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가 발간한 동인지나 제물포청년회의 동인지 『제물포』가 남아 있지 않아 당시 그들의 작품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다. 동인들도 시인, 평론가로 남은 정노풍과 희곡작가가 된 진종혁을 제외하면 후일 모두 다른 길을 걸었다. 진종혁은 1927년 인천 최초의 문예지 『습작시대』를 발간해 인천문단의 기념이 될 만한 업적으로 남기기도 했다.

1. 고유섭(高裕燮). 용동(龍洞) 출신으로 경성제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미학(美學) 및 미술사(美術史)를 전공했다. 1933년 28세에 개성부립박물관장(開城府立博物館長)에 취임하여 한국미술사와 고고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서무간사를 맡기도 했다. 1992년 새얼문화재단에서 시립박물관 마당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사진출처 : 인천문화재단 『아무도 가지 않은 길』)

2. 하상훈(河相勳). 해주(海州) 출신으로 초기 영화보통학교를 나와 인천항 객주로서 활동하면서 민족 상권을 지키는 데 공헌했다. 초기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을 역임했고, 국악동호회인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하여 활약했다. 1927년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 인천지회장과 신정회(新正會) 회장을 맡았다. 1946년 인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3차에 걸쳐 회장을 역임했다. 1964년 작고하자 인천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장례가 모셔졌다.(사진출처 : 인천광역시 『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3. 곽상훈(郭尙勳). 부산 동래 출신으로 소년기에 인천으로 이주하였다.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를 주도했으며, 야구팀 한용단(漢勇團)의 응원단장으로서 일본팀과의 경기에 늘 불타는 민족의식으로 대항했다. 조선소년군(朝鮮少年軍) 제4호 대장, 제헌(制憲) 국회의원, 반민특위(反民特委) 검찰차장, 민의원(民議院) 의장 등을 역임했다.(사진출처 : 인천광역시 『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4. 고일(高逸). 양정고보 학생이면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의 문예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 시대일보 인천지국 기자 등을 역임했다. 광복 후 대중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저서 1920~30년대 인천을 기록한 저서 『인천석금』이 유명하다.

5. 조진만(趙鎭萬). 인천 태생으로 1920년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일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해주지방법원 판사를 출발로 전국 각 지방의 판사직을 역임했다. 1961년 법무장관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사법부 최고의 책임자인 대법원장에 취임했다.

6. 이길용(李吉用). 영화학교를 거쳐 배재학당을 나왔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의 우승 시상식에서 가슴에 단 일장기 사진을 말소하여 한민족의 저항 정신을 일깨운 주인공이다. 경인기차통학생회 멤버이면서 인천 배재통학생 모임인 인배회(仁培會) 멤버로 활동했다.

7. 원우전(元雨田). 서울의 극단 <토월회(土月會)> 무재장치가로 크게 활약했던 인물로 무대미술가가 드물었던 1920∼1930년대에는 사실상 주요 극단의 작품들을 거의 그가 도맡아 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인천에 내려와 인천의 연극 그룹 칠면구락부 멤버로 황동하면서 외리의 상점의 간판을 모두 현대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일화가 있다.(사진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8. 유창호(柳昌浩). 1927년 인천에 내려와 인천 최초의 한국인 유도장 인천무도관(仁川武道館)을 개설하여 후진을 양성했다. 인천 체육인, 교육자, 시장개설자로서 최초의 광복 직후까지 다방면에 걸쳐 족적을 남겼다.(사진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DB)

고유섭은 널리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고미술사학자로 개성박물관장을 지냈으며, 임영균은 인천 최초로 치과의원을 개설한 인물로, 또 1954년 주간인천 신문 발행인으로 알려졌다. 창영초등 출신 조진만은 판사를 거쳐 대법원장을 지냈다.

제물포청년회의 이길용은 영화보통학교와 배재학당을 거쳐 후일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로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禎)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의 주인공이었고, 송건우는 신문기자, 장건식은 은행원, 사업가, 군 장성을 지냈으며, 고 일은 언론인의 길을 걸으며 유명한 저서 『인천석금』을 발간했다.

연극단체 칠면구락부는 1926년에 창단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1928년 6월 22, 23일 양일간에 걸쳐 애관극장에서 제1회 공연을 가져 크게 시민들의 호응을 얻은 것으로 당시 매일신보는 쓰고 있다.

진종혁 각색으로 「춘향전」을 무대에 올렸는데, 연출은 극단 토월회, 낭만좌에서 주연 배우로 활약하던 정암, 무대장치는 토월회 소속의 원우전, 그리고 여배우로 김석정(金石貞)과 인천의 신진 우운희(禹雲姬) 등이 출연하고 있다. 이 신문은 칠면구락부가 인천의 문학청년과 극예술을 연구하는 청년들로 조직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1930년대에는 희곡작가 함세덕(咸世德)과 소설가 현덕(玄德), 그리고 평론가 김동석(金東錫) 등이 등장한다. 이밖에 1937년에는 김도인(金道仁)이 문예지 『월미』를 발행한다. 이처럼 인천의 신문학, 신연극은 이 무렵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와 제물포청년회 멤버들이 앞장서 개척한 것이다.

이우구락부는 뜻있는 인천 분들이 조직한 국악애호 그룹이었다. 주로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 직원으로 구성되어 아마추어적인 활동을 벌였다고는 하지만, 전통 음악 보존과 애국심 고취 사상을 가지고 활동한 인천 최초의 국악 그룹이었다.

이우구락부의 중심 하상훈은 객주로서 인천항에서의 우리 민족 상권을 지키던 인물로 광복 후 인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작고 시, 인천 최초 사회장(社會葬)으로 모셔진 주인공이었다. 최선경은 한성외국어학교 독어과를 나와 세창양행 지배인을 지냈고, 이범진은 동아일보인천지국 기자로 출발해 내리교회에서 청년 계몽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서병훈 역시 인천항 객주 출신으로 하상훈에 이어 동아일보인천지국 2대 지국장을 지내며 노동자 보호와 배일사상을 고취했던 인물이다.

앞장에서 최초의 순수 민간 해운회사를 설명하며 이름을 밝힌 바 있는 정치국도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협률사(協律舍)를 개관해 오늘의 애관극장으로 이어지게 한 공연장 개설의 선구자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체육 분야에 있어서는 인용문 내용대로, 통학생친목회 핵심인물 곽상훈(郭尙勳)을 단장으로 한용단을 결성하고 야구팀, 축구팀, 정구팀을 발족시켜 인천 구기(球技) 운동의 선구로서 활약하면서 민족의 긍지를 드높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구기 운동 외에 항도 인천 체육의 선구는 누구보다도 유도인 유창호(柳昌浩)를 거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20년대에 인천 최초로 한국인 개설 유도장 무도관(武道館)을 외리에 세워 제자를 기르는 한편,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 유도교본을 만든 사람이다. 서울 출신 신태영(申泰永) 또한 인천에 처음으로 권투 도장을 세워 후진을 길러낸 인천 권투계의 대부로서 기념비적인 인물이었다.

인천항 바닷바람과 함께 근현대 문화예술과 체육을 일으켜 앞장서 간 사람들―그러나 어찌 이들뿐이랴. 인천항은 실로 전국 어느 지역보다도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앞서 걸은 선구자들이 수없이 많았던 도시였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