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순수한 빛이 원을 그리며 추는 '창조의 춤'
▲ 영화 '8과 1/2' 중 사람들이 함께 원을 그리며 춤추는 장면.

“영화는 없어. 어디에도…여기서 끝내는 거야.”

영화감독 구이도는 새 영화 촬영을 앞두고 제작 포기 선언을 한다. 신작 준비과정 중 영감의 위기에 직면하며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그는 결국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모든 걸 내려놓기로 결정한 것이다. 현실 속에선 '순수한 빛' 같은 완전한 아름다움을 창조해내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영화 '8과 1/2'(1963)은 한 영화감독이 영화 제작 과정 중 겪는 이야기를 꿈·기억·상상과 함께 버무려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독특하게 표현해낸 이탈리아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대표작이다. 영화 제목이 2편의 단편과 7편의 장편에 이어 8과 1/2번째 작품임을 시사하듯이, 이 영화는 펠리니 감독의 예술 창작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담긴 자전적 영화이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감독은 네오리얼리즘의 한계를 딛고 현실과 환상이 넘나드는 판타지 같은 새로운 세계로 비상한다.

 

상반성의 조화로 완성되는 '아름다움'의 창조

꽉 막힌 도로. 교통 정체로 멈춰선 차량들과 사람들 틈에 포위된 채 차 안에 갇힌 구이도는 질식하기 일보직전이다. 발악 끝에 탈출에 성공한 그는 한 마리의 새처럼 구름 속을 날아간다. 그러나 자유도 잠시뿐, 영화제작진에 의해 발목이 붙잡혀 바다로 추락하고 만다. 오프닝을 연 악몽 장면은 신작 촬영을 앞두고 영화감독 구이도가 겪는 압박감과 공포감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대작 SF영화를 준비 중인 구이도는 삶과 예술 모두 명확한 방향성을 찾지 못하고 혼돈의 미궁 속에서 헤맨다. 삶과 예술의 조화를 꿈꾸며 거짓 없는 솔직한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그는 부조화로 가득한 삶에 지치고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성과 속, 선과 악, 육체와 영혼, 좌익과 우익 등 상반된 것들의 분리로 인해 대립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무질서한 혼돈 그 자체다. 그런 세상 속에서 그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삶이든 예술이든 도피의 길만 찾는다. 요양을 핑계로 2주간의 시간을 번 구이도는 온천장에서도 아내와 정부, 진실과 거짓, 현실과 이상,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방황하며 예술적 영감마저 잃어간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그는 자신의 손을 잡아줄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찾는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 추기경과의 만남은 선악 구도의 이원성에 매몰된 기독교의 한계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해준다. 이제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상상 속에서 불쑥불쑥 현현하는 '구원의 여신'뿐이다. 그녀는 긴 머리에 흰 옷을 입은 아름다운 미모의 여배우 클라우디아의 모습을 한 '순수한 빛' 같은 존재이다. 즉,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전일성(全一性), 조화, 빛의 세 가지 구성요소를 모두 갖춘 완벽한 '아름다움'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 클라우디아와의 대면은 구이도에게 현실과 상상의 큰 간격만 새삼 깨닫게 해줄 뿐이다. 등 떠밀 듯이 도착한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구이도는 외신기자들에 의해 포위된 채 사면초가에 빠진다. 이제 그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뿐... 구이도는 모든 걸 끝장낼 방아쇠를 당긴다.

그런데 이때 텅 빈 허공을 가르는 마술사의 지휘봉에 구이도의 눈이 번쩍 뜨인다. 순간 그의 눈앞에 하나의 '순수한 빛'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춤춘다. 새 영화를 위한 창조의 춤을…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