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서 댕긴 항일 횃불, 영덕서 폭우에 꺼지다

1896년 4월9일 이천 출발 12일 충북 제천 도착
호좌의진과 함께 장현 전투서 전과 올리고 경북행
20일 안동 도착…현지 의진과 연합해 달성 공략
28일 의성 수정사를 근거지로 인근서 병력 확충
5월9일 의흥서 군수품 노획…13일 연합의진 결성
이튿날 청송 성황산서 관군·일본군 기습해 대승
20일엔 비봉산서 승리 거두나 반격으로 퇴각
6월17일 경주성 점령…22일 공격 격퇴했으나
이튿날 탄약·사기 부족해 퇴각…흥해서 재정비
7월13일 영덕서 심한 부상 입자 강물에 몸 던져

정부 포상 독립유공자만 40여명 배출한 의성김씨
문중 일원으로 198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돼
▲ 김하락 의병장 묘(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 김하락 의병장 묘(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 경북지역의 의병 상황

1896년 4월9일(음력 2월27일), 경기도 이천을 출발한 김하락 의진은 여주, 흥원, 백운산 등지를 거쳐 4월12일 충북 제천에 이르러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의 환대와 격려를 받았다. 그리고 호좌의진과 힘을 합쳐 장현(璋峴) 전투에서 적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유인석으로부터 의병투쟁을 함께할 것을 제의받기도 하였으나, 김하락은 정중히 사양하고 본래의 계획대로 경북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자 남하하였다.

일제가 갑오왜란을 일으킨 것에 반발하여 충청도 공주 출신 서상철이 안동지방 유림에게 통문을 보내고 몸소 안동으로 와서 거의했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을미왜란이 일어나자 민심이 극도로 격앙되어 오던 중에 단발령이 불을 붙이니 진작부터 유림 사이에 통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경남 단성(현 산청군 속면) 출신으로 당시 안동에 거주하던 유학자 곽종석(郭鍾錫), 전 도사 김도화(金道和), 전 지평 김흥락(金興洛)과 권진연(權晋淵), 강육(姜錥) 등의 통문이 도는가 하면, 예안(禮安:현 안동시 속면)에서도 유생 이만응(李晩應)·금봉술(琴鳳述), 전 목사 이만윤(李晩允), 진사 김수현(金壽鉉), 전 승지 이중봉(李中鳳) 등 수백 명의 통문이 도는 등 안동 등지는 크게 설레며, 모두 가사와 일신상의 사정을 돌보지 않고 떨쳐 일어섰다.

김흥락·유지호(柳止浩) 등을 중심으로 한 안동의병들은 전 참봉 권세연(權世淵)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또 안동부에서 멀지 않은 선성(예안)에서 전 참의 이만도(李晩燾)를 대장, 이중린(李中麟)을 부장(副將)으로 하는 선성의진(宣城義陣:일명 예안의진)이 형성되어 함께 호응하니, 안동지방의 의병의 기세는 크게 떨쳤다. 그리고 안동의진에서는 대장 권세연 이름으로 각지에 격문을 보내니, 안동의병은 거의 후 10여 일 만에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

1896년 1월17일(음력 12월3일), 안동과 예안 등지의 수백 명의 의병들이 안동부로 몰려가니 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들이 달아나는 바람에 쉽게 안동관찰부를 점령하였다. 그런데, 10여일 뒤 도망갔던 김석중이 인근의 많은 관군을 이끌고 갑자기 쳐들어오니 의진에서는 항전을 시도했지만 훈련된 관군의 체계적인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형세가 기울어지자 대장 권세연은 최후까지 싸워서 한 몸을 바치고자 하였으나 참모들의 간곡한 권고에 의하여 몸을 피했으며, 이튿날 안동읍은 관군의 수중에 장악되고 말았다. 김석중은 읍내 유지들의 집을 수색하고 방화하는 등 분풀이까지 하니 그 광경이 매우 참혹하였다. 이에 안동부민들은 정의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시 여기저기서 모이고 연락하면서 재거의하여 안동부를 공격하였다. 김석중 일행은 달아나다가 문경에서 이강년(李康秊)이 이끄는 문경의진에 붙잡혀 효수되기에 이르렀다.

안동지역 의병들은 안동부에 입성한 후 유난영(柳蘭榮)으로 도총, 김도화를 대장에 추대하였고, 영양·진보·청송·의성·영덕·영해 등지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서로 호응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리하여 김도화의 안동의진, 김도현(金道鉉)의 영양의진, 김상종(金象鍾)의 의성의진, 심성지(沈誠之)의 청송의진, 이수악(李壽岳)의 영해의진, 이강년의 문경의진, 허훈(許薰)의 진보의진 등이 맹활약을 벌이면서 서로 호응하여 유기적인 전략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경기도 지평의병이 제천으로 와서 제천의병과 함께 단양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친 후 보다 규모가 큰 의진을 형성하기 위해 경상도로 내려왔던 서상렬(徐相烈)과 원용정(元容正)이 여러 고을 의병들을 모집하니, 의병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각지의 의진에서 호응하였다. 3월초에는 안동의진의 중군장 권재호(權載昊:일명 권문팔權文八) 및 예안·풍기·순흥·영천·봉화 등지의 의병들이 예천에 모여 서상렬을 맹주(盟主)로 추대하고 맹활약을 벌이고 있었다.

▲ 김하락 의병장 순국지(경북 영덕군 강구항 어귀).
▲ 김하락 의병장 순국지(경북 영덕군 강구항 어귀).

◆ 경북지역 여러 의진과 함께하다

김하락 의진은 단양, 풍기, 영주 등지를 거쳐 4월20일 안동에 도착하였다. 이때 예천에 있던 서상렬 의병장이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할 것을 요청함에 따라 이들과 합진하였고, 또 안동의진과도 합세하여 연합의진을 구성한 뒤 달성을 공략하였다. 그리고 곧 분산하여 의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4월28일 의성에 도착한 김하락 의진은 금성산에 위치한 수정사에 근거지를 정하였다. 그런 다음 인근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병력을 확충하는 한편, 5월9일 의흥(현 군위군 속면)을 공격하여 화약, 무기 등 군수품을 노획하여 화력을 보강하였다. 5월13일에는 이곳에서 활동 중이던 김상종의 의성의진과 연합하고, 이어 청송의진도 가담시켜 세 의진으로 의성 연합의진을 형성하였다. 김하락이 지휘하는 이 연합의진은 5월14일 관군·일본군 170여명이 대구 방면에서 공격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청송 성황산 주위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공격을 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사기가 올라간 의성 연합의진은 각지에서 군수 물자를 지원받고, 자발적인 호응 속에서 의병들을 추가 모집하여 의진을 확대 개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연합의진은 5월20일 비봉산에서 적군 100여명과 교전하여 재차 승리를 거두게 되자 관군·일본군은 병력을 증원하여 5월25일 반격을 가해 왔다. 의성 연합의진은 이들과 하루 종일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결국 화력의 열세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지자 김하락은 퇴각하여 경주로 이동하였다.

5월26일 비봉산을 출발한 김하락 의진은 황학산, 금학산, 황산, 청송, 덕현, 영천 등지를 거쳐 6월15일 경주에 도착하였다. 김하락 의진은 경주에서 김병문(金炳文), 이시민(李時敏), 서두표(徐斗杓), 박승교(朴承敎) 등 유림 세력과 다시 연합하여 경주 연합의진을 결성하였다. 이 의진은 조직을 정비한 후 관군 약 50여 명이 주둔해 있던 경주성 점령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6월17일 조성학이 선봉이 되어 경주성 동문을 공격하자 관군이 일제히 포를 쏘며 대항하였다. 이에 김하락은 “너희들이 의병에 대항하니 이것은 역적을 돕는 큰 죄악이다. 만약 끝내 미혹을 고집한다면 옥석구분(玉石俱焚)의 경우를 면치 못할 것이다. 빨리 성문을 열어 후회가 없게 하라”라고, 설득한 후 의진을 이끌고 성문을 공략하자, 관군이 달아나서 손쉽게 경주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

경주성을 점령하자 김하락은 각지 유지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활동에 적극 호응해 줄 것을 당부하는 한편, 의병들을 성내 곳곳에 배치하여 철통같은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따라서 김하락이 지휘하던 경주 연합의진은 6월22일 대구부에서 파견한 150여 명의 관군과 안동진위대의 지원군이 합세한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퇴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차 공격에서 패퇴한 관군은 총병(銃兵), 궁수(弓手) 등 대구부의 정예 군사들로 병력을 보충하고, 나아가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의 지원을 받아 6월23일 다시 경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에 대항하여 경주 연합의진은 30여명의 전사자를 내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계속된 전투로 말미암아 탄약이 떨어지고, 의병 또한 동요함에 따라 결국 경주성을 내주고 말았다.

▲ 의성의병장 김상종의 격문.
▲ 의성의병장 김상종의 격문.

◆ 이천의진의 최후와 김하락의 순국

그 후 김하락은 기계(현 포항시 속면)로 나아가 흩어졌던 의병들을 모으고, 흥해(현 포항시 속읍)와 영덕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의진을 다시 정비하였다. 그리고 7월5일 신돌석(申乭石)의 영해의진과 합세하고, 7월9일 유시연(柳時淵)의 안동의진과도 합진함에 따라 김하락의 의진은 영덕의진, 영해의진, 안동의진 등과 다시 대규모의 연합의진을 형성하였다. 김하락은 이 연합의진을 동원하여 영덕 관아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고 활동하였다.

마침내 7월13일(음력 6월3일) 영덕에서 관군과 격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튿날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관군·일본군 수백 명이 몰려오자 김하락이 이끈 연합의진은 고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폭우 속에 화승총은 말할 것도 없고, 활조차 사용할 수 없으니, 의병들은 대항할 수 없어 대부분 흩어진 가운데, 김하락은 좌우 가슴(갈빗대)에 총탄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김하락은 피체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적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

하고, 강물에 몸을 던지니 함께 있던 의병들도 물에 빠져 죽는 이들이 많았다.

이리하여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그리고 다시 경북으로 이동하면서 약 7개월 동안 줄기차게 의병투쟁을 벌였던 김하락 의진의 활동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김하락의 이천의진이 남한산성을 점령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고자 한 것은 민용호(閔龍鎬)의 관동의진이 원산 공략에 나섰던 것과 노응규(盧應奎)·정한용(鄭漢鎔)의병장이 이끈 경남 연합의진이 부산진공을 위해 김해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던 것과 함께 일제침략의 발판을 장악하고자 했던 3대 작전으로 손꼽힌다.

남한산성이 관군에 의해 점령된 후 김하락은 이천의병을 이끌고 이천에서 의병투쟁을 벌이지 않고 남하한 것은 경북 의성·안동 등지에서 지역민의 신망이 두터운 가문을 믿고 의지한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김하락은 의성김씨 출신으로 의성사람이었다. 의성 김씨 시조 김석(金錫)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석이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지면서 그 후손들이 의성을 본관으로 하였으니, 신라 왕족이요, 고려 왕조의 외손인 셈이었다. 의성김씨 가문은 조선시대 정승에 오른 이는 없지만 군(君) 7명, 시호를 받은 자 13명, 문과 급제자만 99명을 내었고, 문집을 출간하거나 유고를 남긴 이가 수백 명이나 되는 명문가였다.

▲ 경북 안동시 내앞마을은 집집마다 독립유공자가 다수인데, 그 앞에 경북독립기념관이 들어섰다.
▲ 경북 안동시 내앞마을은 집집마다 독립유공자가 다수인데, 그 앞에 경북독립기념관이 들어섰다.

안동의병을 일으킬 때 유림의 대표로 추앙되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은 족형이었고, 안동의병장 김도화를 비롯하여 가문의 많은 인사들이 의병에 참여했으며, 경술국치 직전 영남 최초의 근대 중등교육 기관인 협동학교를 세워 청소년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힘쓰면서 경술국치를 당하자 66세의 노령임에도 청장년들을 이끌고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과 함께 서간도로 들어가서 이주 한인들의 정착을 위해 일생을 바친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도 족형이었고, 기미년 안동만세의거 때 중심인물로 활약하다가 피체, 총살 순국한 김필락(金珌洛)은 족제이며,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대한통의부 등에서 활약하다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한 김동삼(金東三), 협동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면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가 고초를 겪은 김병식(金秉植), 일제강점기의 유림대표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으로 활동하다가 14년형을 받고 7년째 복역 중, 두 다리가 마비되자 형집행정지로 풀려나왔고, 광복 후 유도회 회장 겸 성균관 관장을 역임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김창숙(金昌淑) 등 의성김씨 문중에서 정부로부터 포상된 독립유공자만 무려 40여명이나 되니, 김하락이 경북지방으로 나아가 의병투쟁을 전개하게 된 까닭이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김하락 의병장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국가보훈처와 광복회·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이달의 독립운동가'(1996년 7월)로 선정하였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