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소통하고 도움 주는 '다자간 품앗이'
▲ 지역화폐공부모임.
▲ 지역화폐공부모임.

지역화폐가 다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경제 위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지역경제가 침체할 경우 체력이 없는 소상공인들에겐 치명적이다. 기초지방정부가 하나같이 지역화폐에 시선을 돌리는 이유는 소상공인을 보호하고 지역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인 셈이다.

지역화폐는 시민이 자발적으로 공동체 가치 실현을 위해 소규모로 발행한 것이 시작이었는데, 최근 정부가 지역경제를 살린다며 '할인 상품권' 성격의 지역화폐가 주를 이루고 있다.

 

#지역화폐 태동과 유형

지역화폐의 태동에는 대부분 굵직한 경제 위기가 있었다. 1999년 국내에서 지역화폐가 처음 태동한 것도 IMF 외환위기 때문이다. 불황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지역화폐가 지역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특효약'으로 주목받으면서 유행처럼 번졌다.

지역화폐운동은 품앗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신이 가진 기술과 자원을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고 그 대가로 지역화폐를 받는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동체 화폐를 매개로 네트워크를 이루며, 옛 농경 사회에서 품을 나누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지역 공동체라고 할 수 있어 현대적 의미의 '다자간 품앗이'로 불린다.

지역화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상품권을 기반으로 한 공공형 지역화폐와 노동형 교환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형 지역화폐다.

현재 대부분 지역화폐로 알고 있는 유형은 공공형 지역화폐로, 행정이 발행·지급하고 소비자는 일정 금액을 캐시백·인센티브·할인 형태로 되돌려 받는 방식이다.

행정이 발행·지급하는 만큼 파급력이 빠르고, 고정적인 정책지원금을 지역화폐로 지급해 안정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반면 공동체형은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지역 상점 등이 중심이 된 방식으로, 주민간 유대감을 형성해 풀뿌리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장점이 있다.

 

#경기도내 공동체형 지역화폐의 명암

1996년 '녹색평론'이 지역화폐를 소개하자 시민사회는 지역화폐 운동을 했다. 도내에도 수많은 지역화폐 공동체가 생겼다.

지역마다 이용 규정은 다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같다. 화폐의 창출보다는 그것을 매개로 이웃과 소통하고 서로 도움을 주며 신뢰를 쌓아가는 공동체 형성이다.

2004년 3월 광명의 23개 시민사회 단체와 기관이 모여 '지역품앗이 광명그루'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지역화폐 그루를 이용해서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교육과 문화서비스, 봉사활동도 이뤄졌다. 시민들이 주고받은 그루는 광명더불어숲통장에 기록을 통해 거래했다.

의정부·동두천·포천·양주 등 경기 북부지역에서 시작한 공동체 실험인 '의정부 레츠'는 2008년 시작했다. 레츠(LETS)란 지역통화제도(Local Exchange Trading Systems)의 약자다. 의정부 레츠는 '누리'로 거래했다. 벼룩시장에서 살 수 있는 헌 옷·장난감·음식물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제값을 못 받는 시장 봐주기, 청소 해주기, 아기 돌보기 등도 있다.

초기에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지역화폐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회원들 간의 끈끈한 정 때문이라고 한다. 지역화폐가 '인간의 얼굴'을 한 화폐로 불리는 이유다.

공동체 지역화폐 플랫폼을 운영중인 황순식 정의당 경기도당위원장은 “시민사회가 자발적으로 이룬 지역화폐 운동은 다른 어떤 공동체보다도 공고하다”며 “돈이면 다 해결되는 사회에서 지역화폐는 돈이 없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제공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줘 참여자의 만족감이 높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상당수가 지역화폐 운동을 중단한 상태다. 광명그루는 2009년에, 의정부레츠는 2013년에 해산했다.

도내에 유일하게 남은 공동체는 과천품앗이다. 도내에서 처음 시작됐고, 오랫동안 남은 공동체다. 과천품앗이는 2000년 10월 지역주민들이 공동육아를 위해 시작했다.

김은희 '과천품앗이' 전 운영위원장은 “'과천품앗이'는 처음에는 육아공동체로 시작했다가 지역화폐공동체로 발전했다”며 “주부들의 가사노동을 활용해서 서로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아리'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주로 주부들로 구성된 '과천품앗이'는 재능 또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아리'로 품삯을 받는다. 도움을 주고받으며 발생한 화폐 아리는 각자의 통장에 서로 플러스와 마이너스 숫자로 적어두고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서 쓴다. 어떤 주부들은 애완동물을 맡아주거나 모임 장소를 제공해주고 '아리'를 받기도 한다. 회원들은 '아리'로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거나, 도자기 공방에서 수강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지역주민의 노동력과 물건에 일정한 가치가 부여될 때 발생하는 아리는 일상의 경제활동 일부를 대신하거나 지역 내 소상공인들이 가맹점 형태를 통해 지역화폐를 유통할 수 있게 해서 상권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

김 전 위원장은 “작은 지역단체가 지금까지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나눔 속에서 공동체의 즐거움을 맛보았기 때문”이라며 “사무실도 없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임금을 받는 사람도 없고, 외부에서 지원받는 것도 거의 없지만 마치 화수분처럼 필요한 것들이 회원들의 배려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수많은 조직이 사라진 이유는 지역화폐를 운영했던 조직이 그만큼 취약하기 때문이다.

황 위원장은 “수많은 공동체가 발행·관리·환금 등에 필요한 인력, 예산 문제, 세대교체 미흡, 신입회원 확보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라진 곳이 많다”며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는 곳을 보면 스스로 희생이 있다”고 설명했다.

 

#공동체 지역화폐의 필요성

공동체 지역화폐는 사용할 수 있는 가맹점 수가 적어 확장성이 떨어지는 등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기에는 한계가 있는 모델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지만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들 공감한다. 그것은 지역화폐가 가지고 있는 특성 중 하나인 공동체 가치를 실현하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현재 공공성 지역화폐는 공동체 가치보다는 경제 활성화에 치중돼 있다.

공동체 가치가 중요한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는 청년실업·빈부격차·갈라지는 사회 등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공공정책을 가르치는 폴 콜리어 교수는 “공동체 균열을 해결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이때문에 지역화폐 두 유형을 병행하거나 합치는 형태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병조 경기연구원 연구위원은 “지역화폐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화할 것”이라며 “지역화폐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뿐만 아니라 주민, 소상공인, 전문가, 시민사회단체, 사회적 기업 등 모두 모여 논의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은희 전 과천품앗이 운영위원장

 

“아파트라는 단절된 주거환경

누군가 내게 관심 기울여줄 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과천품앗이는 누구나 화폐 발행권을 갖는 주체가 된다. 그러므로 각자의 모든 활동이 거래의 내용이 된다.

반찬 솜씨를 나누는 것, 만든 반찬을 나누는 것, 자동차를 함께 타는 것, 애완동물이나 텃밭의 채소를 돌봐주는 것, 대신 시장을 봐주는 것, 바느질법을 알려주는 것, 부모 대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 청소나 화분 분갈이를 돕는 것, 서로의 책을 빌려주는 것, 심지어 힘들 때 같이 수다를 떨거나 자신만이 알고 있는 등산길을 알려주는 것 등 일상에서 '감사'가 필요한 모든 것이 그 내용이 된다.

김은희 전 과천품앗이 운영위원장은 “10년 전 품앗이 회원이 되고 나서 첫 거래를 위해 낯선 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의 어색함, 약간의 설렘, 그리고 마주한 따뜻한 인연이 나를 지금으로 이끌었다”며 “도시 속 아파트라는 단절된 주거환경에서 관계를 확장하고 값진 가치를 나누며 누군가가 내게 관심을 기울여줄 때, 우리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힘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불편한 시부모를 모시면서도, 멀리 이사해도 품앗이를 찾는 이들이 있는 것은 이곳이 별나게 훌륭해서가 아니라고 한다. 도리어 군데군데 비어 있어서, 그 빈자리를 채우며 서로의 존재 의미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과천품앗이가 예전 같지는 않다. 한때 200여명이 넘는 회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줄었다.

김 전 위원장은 “코로나때문에 거의 공동체 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면이 있다. 그리고 그전부터 지역내 재건축에 따른 회원 이동, 신입 회원 유치의 어려움으로 점차 내림세였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과천품앗이 버티고 있는 것은 역시 '회원'이다.

그는 “공동체의 참뜻을 지키기 위해 경직되지 않고 긴장의 진동을 지키며 방향키를 잡아내려 노력했던 회원들”이라며 “회원들이 가진 힘의 원천은 새삼 말하지만 '즐거움'에 있다. 품앗이 회원으로 누리는 즐거움이 없다면 과천품앗이는 유지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남춘 기자 baikal@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