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관문 인천, 신교육 씨앗 뿌려지다

쇄국정책 의한 정세 무지 … 빈곤으로
내리교회 존슨 목사가 세운 영화학당
답동성당 박문학교 인재 양성 역할

인천항신상협회 서상빈, 제녕학교 설립
부두노동자 조합 조장 김정곤 경비충당

정재홍 교감 등 공동으로 세운 인명학교

천기의숙, 신상회사·인천 유지 주축 세워
정재홍·김윤정 일류 사립학교 고수 고집
일본 공립학교 명분 간섭하려했으나 실패
정재홍 권총 자결 … 애국충정 드러냈다 설도

김병훈 세운 의성사숙, 아동 전통 교육 앞장

관서·동명·계명·영신학원 탄압 속 태어나
성공회 병원 랜디스 박사 영어야학 열기도
현대사 한바퀴
현대사 한바퀴
▲ 성공회 내동교회 병설 낙선시병원(樂善施病院)의 의사 랜디스 박사가 연 영어야학교 학생들. 1894년에 촬영한 사진으로 중앙에 앉은 사람이 랜디스 박사이다. 그는 조선인들에게 인술을 베풀어 약대인(藥大人)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사진출처= 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김윤정(金潤晶)의 1926년 충북도지사 시절 모습이다. 그는 인천 부윤으로 재직하며 조선인 2세 신교육을 위해 노력했으나 후일 충북지사 등을 역임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김윤정(金潤晶)의 1926년 충북도지사 시절 모습이다. 그는 인천 부윤으로 재직하며 조선인 2세 신교육을 위해 노력했으나 후일 충북지사 등을 역임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인천항 이야기를 하며 빼놓을 수 없는 분들이 우리의 선대(先代) 교육자들, 교육 선구자들이다. 개항 초부터 2세 교육의 중요성에 눈을 뜬 선각들의 개화 의식이 없었다면, 우리 인천이 오늘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덧붙여 우리 인천은 이들 선구자들에 의해 인천사람 특유의 세련된 지성과 풍부한 감성, 시민의식 배양의 전통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싶다.

내동에 서당이 하나밖에 없던 시절에 선교 활동과 함께 시작한 영화학당(永化學堂)과 박문학교(博文學校)는 신교육 전수를 통해 앞날의 인천을 이끌어 갈 많은 인재를 길러내게 된다. 하나의 노동시장에 지나지 않았던 삭막한 제물포에 이 포구가 우리나라의 출입 관문이었다는 이유로 종교와 교육이라는 소중한 근대 문화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무지와 빈곤이 한 시기에 겹치는 것처럼 절망적인 비극은 없다. 당시 한국은 공교롭게도 전통적인 쇄국주의로 인한 근대 국제 정세에 관한 무지 그리고 계속된 내정 문란으로 인한 전국적인 빈곤으로 짓눌려 있었다.

이 글은 개항기 인천에 들어온 내리교회와 답동성당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교회들이 세운 학교인 영화학당과 박문학교의 신교육 전수가 앞날의 인천을 이끌어나갈 인재 양성의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밝히는 내용이다. 신태범 박사의 『개항 후 인천 풍경』에 나오는 구절로, 무지는 곧 절망적 빈곤으로 이어지는 비극임을 깨우쳐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종교 기관의 신교육도 신교육이었지만, 순수 우리 민간 선각자들의 '배워야 산다'는 교육열이 더욱 인천을 신교육의 도시로 일어서게 했다. 그 첫 인물이 본 연재 제16화에서 인천항신상협회를 설명하는 중에 소개한 서상빈이다. 그는 인천 최초의 사립학교인 제녕학교(濟寧學校)를 1904년 무렵에 세웠다.

▲ 김윤정은 정재홍 사망 이후에도 부윤이라는 중심 위치에서 열성적으로 인명학교를 보조한다. 그와 함께 의연금을 낸 교육 선구자 서상빈(徐相彬)의 이름이 보인다. 1908년 3월 28일 황성신문 기사이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김윤정은 정재홍 사망 이후에도 부윤이라는 중심 위치에서 열성적으로 인명학교를 보조한다. 그와 함께 의연금을 낸 교육 선구자 서상빈(徐相彬)의 이름이 보인다. 1908년 3월 28일 황성신문 기사이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정재홍이 1907년 3월 14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학교 건축 입찰 공고이다. 우각동에 '40간 단층집'을 건축할 터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인명학교 건물 입찰로 보인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정재홍이 1907년 3월 14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학교 건축 입찰 공고이다. 우각동에 '40간 단층집'을 건축할 터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인명학교 건물 입찰로 보인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정재홍의 부고이다. 정재홍은 1907년 6월 30일 금능위 박영효(朴泳孝) 환영연에서 권총 자살을 했다. 7월 6일 정동교회에서 장의 예배를 하고 아현동 공동묘지에 매장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인명학교 유지회원총대표(維持會員總代表)를 맡았던 부호 장내흥(張乃興)의 이름도 보인다. 1907년 7월 5일자 황성신문 기사이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정재홍의 부고이다. 정재홍은 1907년 6월 30일 금능위 박영효(朴泳孝) 환영연에서 권총 자살을 했다. 7월 6일 정동교회에서 장의 예배를 하고 아현동 공동묘지에 매장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인명학교 유지회원총대표(維持會員總代表)를 맡았던 부호 장내흥(張乃興)의 이름도 보인다. 1907년 7월 5일자 황성신문 기사이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제녕학교에 대해서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어 학교 개교와 후일의 폐교 등에 대해 새삼스런 언급은 줄이나, 이 학교에서 봉사한 교사들은 당시 인천해관 방판(幇辦)으로 있던 인사들이 주였음을,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의 기록을 빌어 밝힌다.

야학으로는 이들 방판이 교대로 영어를 가르쳤었다. 강사 중에 특기할 분은 수석방판 강준(姜準) 씨요, 장기빈(張箕彬-張勉 씨의 부친) 씨, 이학인(李學仁-전 방송관리국 盧昌成 군의 빙부) 씨, 이용인(李容仁-전 조선은행 전무 李興雲 군 부친) 씨 형제 방판 등이다. 주학(晝學)에는 일반 신학문을 교수했는데 수석교사는 서병희(徐丙熙) 씨다. 그리고 교무는 관립외국어학교 교관을 겸무하고 있던 서병협(徐丙協) 씨였다.

제녕학교가 처음 내동에 교사(校舍)를 마련할 때, 자금을 지원하고, 학교 교감을 맡아 경비를 충당하고자 애썼던 김정곤(金貞坤) 같은 인물이 있었다. 김정곤은 영신조(永信組)라는 인천항 부두노동자 조합의 조장으로 노동운동도 이끌었던 사람이다.

또 하나의 학교는 인명학교(仁明學校)이다. 이 학교는 정재홍(鄭在洪)이 단독 설립한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906년 2월경에 전 인천감리 서병규(徐丙珪), 그리고 서상빈, 당시 부윤(府尹) 김윤정(金潤晶) 등이 공동 발기하여 이듬해, 1907년 5월에 설립한 학교였다. 정재홍은 교감으로 학교 일에 전임했다.

이밖에 천기의숙(千起義塾)이라는 학교가 1907년 5월, 신상회사를 주축으로 한 인천 유지, 신사들의 발기로 설립된다는 기사 있다. 설립 시기로 보아 인명학교와 이 학교가 동일한 학교인지 모르나, 기사는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그저 상당한 자금을 모아 우각리에 터를 매입하여 서양식 학교 건물을 지으리라는 내용이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 실려 있다. 중심인물은 김윤정과 정재홍이었다.

▲ 1904년 2월 9일, 소월미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러시아 전함 바리야크 호를 인양하는 장면. 팔미도 앞에서 벌어진 러일해전 당시 일본의 공격에 타격을 입은 러시아 전함들은 전세(戰勢) 불리를 깨달고 소월미도 해상으로 퇴각, 자폭했다.침몰한 바리야크 호를 김정곤(金貞坤)이 인양하여 거금을 쥐면서 서상빈의 제녕학교 교사 마련에 기여한다./사진출처 =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1904년 2월 9일, 소월미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러시아 전함 바리야크 호를 인양하는 장면. 팔미도 앞에서 벌어진 러일해전 당시 일본의 공격에 타격을 입은 러시아 전함들은 전세(戰勢) 불리를 깨달고 소월미도 해상으로 퇴각, 자폭했다.침몰한 바리야크 호를 김정곤(金貞坤)이 인양하여 거금을 쥐면서 서상빈의 제녕학교 교사 마련에 기여한다./사진출처 =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학교 설립이 알려지자 학부(學部)가 나서서 그 부지에 사립이 아닌 공립학교를 설립하자고 인천항 유지들을 설득했으나, 정재홍은 한마디로 거절하면서, 학교 모든 시설은 물론 넓은 운동장에 교구(敎具) 등도 최신 설비로 마련하여 공립학교 이상의 일류 사립의무학교(私立義務學校)를 설립하겠다고 고집한다.

일본 이사청(理事廳) 역시 공립학교를 명분으로 학교 설립에 대해 간섭을 하는데, 정재홍의 의지를 꺾지는 못한다. 저들이야 인천의 객주, 신상들이 합심해서 대규모 최신 사립학교를 세우는 것이 매우 못마땅했을 것이다.

아무튼 천기의숙은 숙장(塾長)으로 서울의 서병철(徐丙轍)을 초빙하는 등 교사진용까지 거의 확정해 발표한다. 그러나 그 후 이 학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학교 설립의 중심 역할을 하던 정재홍의 돌연한 자결(自決)로 말미암아 모든 설립 절차를 중단하고, 인명학교 육성에만 전력했는지 모른다.

정재홍은 1907년 6월 30일, 경성의 농상소(農商所)에서 열린 금능위(禁陵尉) 박영효(朴泳孝) 환영연에서 사상팔변가(思想八變歌)와 생욕사영가(生辱死榮歌)를 남기고 권총 자결을 했던 것이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하려 했다는 설과 박영효를 살해하려다가 그것이 불가능하자, 애국 충정을 자신의 죽음으로써 드러냈다는 설이 있다. 정재홍은 2세 교육 외에도 신상(紳商)으로서 선박회사를 경영했고, 대한자강회인천지회장(大韓自强會仁川支會長)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빈한한 미취학 아동들을 위해 김병훈(金炳勳)이 세운 의성사숙(意誠私塾)은 우리 전통 교육에 앞장섰다. 시기적으로는 훨씬 후에 일이나, 민간 사설 강습소도 다수 생겨나 신학문과 민족 사상 고취에 나섰다.

1929년 박창례(朴昌禮)의 관서학원(關西學院)으로 시작한 동명학원(東明學院), 유창호(柳昌浩)의 인무학원(仁武學院), 이순희(李順喜)의 계명학원( 啟明學院), 황용석(黃用石).황용문(黃用文) 형제의 영신학원(永信學院) 등등이 일제의 간섭과 탄압 속에서도 조선인 학생들에게 신교육을 베풀기 위해 생겨난다.

이밖에 이국인으로 사립 영화학교를 세운 존스 목사 부부, 영어야학을 연 성공회 낙선시병원의 랜디스 박사들의 고마움도 있다.

인천항이 존속하는 한, 이들 인천항 교육 선구자들의 성함 또한 기억될 것이다. 더불어 교육 현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학교 일이라면 언제라도 정재(淨財)의 의연(義捐)을 마다않던 인천항의 수많은 객주, 신상들의 선각적 열의 역시 잊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김윤정처럼 후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돌아선 인물도 있지만….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