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식 UN지속가능발전교육인천센터 선임연구위원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나이 60이면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귀를 순하게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요즘 정치적 술사들에게는 이순보다 구순(口順)이 필요해 보인다. 입을 순하게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아주 오래 전, 사회 초년생 시절이었다. 직장 선배들을 알게 되고 업무 중요도가 높아질수록 다른 사무실을 들르는 일이 많아졌다. “점심 한번 사야지”하는 인사를 종종 받았다. 간혹 얼굴이 불거지고 핑계를 댔다. 궁리 끝에 “선배님, 점심 사 주시죠”하며 선제 방어에 나섰던 기억이 새롭다. 그 후 전세가 역전되는 듯 점심 요구가 뜸해졌던 기억이다.

이런 상황이 요즘 매스컴을 통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사과는 고사하고 변명이나 핑계도 없다. 오히려 역공이 하늘을 찌른다. 특히 정치권은 눈만 뜨면 상대방에 대한 공격이다. 편을 가르고, 물타기 전략 정도 되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달 국회 법사위 예산심사 전체회의에서 나온 “의원님들 살려주십시오 한번 하세요 예산”이라는 말이 정치권 구순 논란으로 번졌다. 판사 출신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의 갑질 호의에 현직 대법관인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이 민망해 하던 모습을 국민들은 생중계로 지켜봤다.

구순이 필요한 시대다. 돌이켜 보면 '소설 쓰시네', '찌질한 장관', '8·15집회 주동자는 살인자', '정치 하수들의 바보짓', '윤서방파', '문서방파' 등 곳곳에서 말의 향연이 아닌 추연(醜宴)이 벌어졌다. 반대편에 대한 공격은 집요하고 악랄하다. 이런 현상은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결국 사회 불안을 가중시키는 원인이다. 한 번 '좌표'에 찍히면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언론에 노출된 유명인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극단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특히 인지능력이 발달단계인 청소년들에게 치명적 상처를 안기는 경우가 많다.

최근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을 선언한 바이든은 “붉은 주(공화당), 푸른 주(민주당)를 떠나 미국 전체를 보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상황과 우리나라 상황이 유사하다.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도는 거의 절반씩이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긍정평가와 부정평가가 각 45% 내외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나라가 진영에 따라 반으로 갈라졌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나 균형 구도에서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면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편을 깎아내리고 짓밟는데 집중하게 되면 망국과 같은 질곡의 역사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는 비참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미국과 중국의 세계 종주권 다툼이 거세다. 우리 앞에 한 발 한 발을 신중하게 내디뎌야 하는 각박한 국제정세가 펼쳐지고 있다. 우리 내부의 통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실은 어떤가.

공자가 제시한 이순은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고 세상 이치를 깨달아 어떤 일을 들으면 모두 이해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통용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비교적 세상 이치에 밝은 사람들도 똑같은 상황을 놓고 정반대의 논리로 방송과 지면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으니 말이다.

올해 1년 내내 지속되며 전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부동산 스트레스 등 저열한 말싸움에 국민들은 지친다. 그 어느 때보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국제정세에서 우리나라가 과거 국론 분열로 인해 일본에 의한 강제 병합의 빌미를 제공한 카쓰라 태프트 밀약, 한국전쟁의 한 원인이 된 애치슨 라인 등의 피해를 다시 보지 않으려면 정쟁을 멈추고, 치유와 단합을 위한 진정한 정치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진영논리로 분열을 조장하며 언론을 장식하는 정치인들에게 '구순'을 권하고 싶다. 제발 두 귀, 두 눈으로 듣고 본 내용을 국민을 위해 신중하고 이치에 맞도록 정리해서, 하나뿐인 입으로 내보내라고. 또 진실하지 않은 현란한 이벤트성 말의 유희는 삼가해 주길 부탁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적폐 수사를 통해 진실이 알려졌을 경우, 마치 사육당한 가축처럼 비참한 기분에 빠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