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도 인천 빛낸 한국 최초 도선사와 해운업자 삼신기선

항해 기술자 유항렬 선장, 한국 최초 도선사 획득
인천상륙작전 1·4후퇴 당시 유엔군 함정 안내도
2009년 신순성 함장과 '해기사 명예 전당' 헌정

삼신기선 유일한 한국인 민간 해운업체로 성장
유진식 사장, 강화 교통 은인 … 주민을 주주로
수완 좋은 김종섭, 회사 업무 도맡아 발전 기여
▲ 유항렬(劉恒烈) 선장.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 함정인 양무호 신순성(愼順晟) 함장의 뒤를 이어 1925년 동경상선학교를 졸업한 뒤 항해사를 거쳐 선장이 되었다. 1937년 한국인 최초로 인천항 도선사(導船士) 자격을 취득한 뒤, 1970년 정년퇴임 때까지 도선사 임무를 수행했다./사진 출처= 인천일보 DB
▲ 유항렬(劉恒烈) 선장.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 함정인 양무호 신순성(愼順晟) 함장의 뒤를 이어 1925년 동경상선학교를 졸업한 뒤 항해사를 거쳐 선장이 되었다.
1937년 한국인 최초로 인천항 도선사(導船士) 자격을 취득한 뒤, 1970년 정년퇴임 때까지 도선사 임무를 수행했다./사진 출처= 인천일보 DB
▲ 1933년 10월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삼신기선의 철선 갑제환의 모습이다. 오래된 사진이어서 선명하지 못하다.
▲ 1933년 10월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삼신기선의 철선 갑제환의 모습이다. 오래된 사진이어서 선명하지 못하다.

항구는 큰 바닷사람, 해양인을 낸다. 또 한 분 인천에서 난 해양인이라면 유항렬(劉恒烈, 1900~1971) 선장을 꼽는다. 유 선장은 바로 근대 한국 최초의 항해사 신순성 함장의 직계 후배가 된다. 그러나 유 선장은 1900년에 출생했고, 신 함장은 그 이듬해인 1901년에 동경상선학교를 졸업했으니 두 분의 연령 차이는 20년이 넘는다.

항도 인천에 현대적 항해(航海) 기술자가 있었다. 현존한 분으로 전국에 유명한 유항렬(劉恒烈) 씨와 그 선배인 작고한 신순성(愼順晟) 씨가 바로 이 나라의 자랑할 인물인 것이다.

일제시대에도 외국 선박에는 말할 것도 없었고, 일본 선박도 출입항(出入港)에 있어서는 소위 '미스시케 안나이(水先案內)'라고 하는 Pilot에는 유항렬 씨가 약에 감초(甘草)라기보다 병자에 대한 명의(名醫) 같은 존재로서 이 나라에 군림(君臨)하고 있으니, 해방 후 미군이 진주(進駐)할 때도 유항렬 씨의 역할(役割)은 매우 컸었다. 전 국방 장관이었던 신성모(申性模) 씨도 유항렬 씨의 후배였다.

누차 소개한 바 있는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의 내용이다. 70여 년 전 필치여서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천의 두 분 초창기 해양인에 대한 경의와 인천 사람으로서의 긍지는 솔직하게 느껴진다. 다만 마지막 부분, '전 국방장관 신성모가 후배'라고 한 것은 국내에서의 활동을 따질 때, 후배라는 의미일 것이다. 신성모는 이미 영국에서 선장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에 귀국했기 때문이다.

▲ 삼신기선 사장 유진식(兪鎭植) 모습. “천품이 인자후덕하며 과언(寡言) 정중(鄭重)하여 동정심이 풍부하고 사관(事觀)에 달관하여 유위(有爲)한 사업이라면 거금의 희사(喜捨)를 불석(不惜)한다.”는 평을 받았다.
▲ 삼신기선 사장 유진식(兪鎭植) 모습. “천품이 인자후덕하며 과언(寡言) 정중(鄭重)하여 동정심이 풍부하고 사관(事觀)에
달관하여 유위(有爲)한 사업이라면 거금의 희사(喜捨)를 불석(不惜)한다.”는 평을 받았다.
▲ 명석한 두뇌 소유자로 시대 추이에 적응한 수완가라는 평을 들은 삼신기선 전무 김종섭(金鐘燮) 모습. 그는 사업 수완과 함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활동으로 인천부회 위원, 상공회의소 의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 명석한 두뇌 소유자로 시대 추이에 적응한 수완가라는 평을 들은 삼신기선 전무 김종섭(金鐘燮) 모습.
그는 사업 수완과 함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활동으로 인천부회 위원, 상공회의소 의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유항렬은 충남 공주 출신으로 신순성(愼順晟)에 이어 두 번째로 1925년에 도쿄상선학교(東京商船學校)를 졸업했다. 귀국 후 1926년 조선유선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영강환(榮江丸), 평안환(平安丸) 등의 기선(汽船) 함장으로 10여 년간 인천 - 칭타오(靑島) - 상하이(上海) 간을 운항했으며, 한국 최초로 인천항 도선사(導船士) 자격을 취득했다. 인천항은 간만의 차가 특히 심하고 내항으로 진입하는 수로가 좁아 어느 항구보다도 도선사의 숙련을 요하는 곳이다. 유항렬은 1947년 인천항으로 상륙하는 미국의 리퍼블릭 선단을 입항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고, 인천상륙작전과 1·4후퇴 당시 수천 척의 유엔군 함정과 군용선의 수로 안내를 도맡아 했다. 1970년 정년퇴임 때까지 도선사의 임무를 충실히 해냈다.

이렇게 『인천시사』는 유항렬에 대한 해양인으로서의 이력과 업적을 요약한다. 일본인들의 견제와 훼방을 이겨내고 1937년 한국인 최초로 면허를 따낸 인천항 도선사. 바다를 향한 애착엔 정년이 없다며, 언제고 인천항을 내려다볼 수 있게 자신의 저택 서쪽에 전망대처럼 발코니를 만든 인천 해양인. 그는 신순성 함장과 함께 2009년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기도 했다.

인천이 낸 순수 민간 해운업자라면 삼신기선(森信汽船) 설립자 유진식(兪鎭植)과 전무 김종섭(金鐘燮)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기록은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 나오는 내용이 유일하다.

당시 강화읍내에서 포목 도매상과 인천에서 삼신상회(북성동 전 해군 경비부 근방)라는 물산객주를 경영하던 거상 유진식이 모든 여건을 감안한 후 1915년 무렵에 발동기선을 구입하여 강화·인천 간을 운항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이 적중하여 삼신상회는 유일한 한국인의 해운업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중략>

유진식은 회사를 강화도민의 소유로 만들겠다는 집념으로 본사를 강화읍내에 두고 주주도 강화에서 널리 분산 모집했다. 이것이 후일 강화도민이 일치단결하여 회사를 돕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회사 설립 이래 수완이 뛰어난 김종섭이 업무를 맡아 회사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유진식과 김종섭에 대해서는 1937년 10월 17일자 매일신보에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한 마디로 유진식은 '강화 교통계의 은인'으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김종섭은 회사가 곤란을 겪을 때 구원투수로서 활약한 인물이다. 먼저 기사에 나와 있는 삼신기선의 규모를 보자. 당시 조선인 소유로서는 어마어마했다.

▲ 인천수선조합(仁川水先組合) 광고. 1939년 4월29일 일본어 신문 조선신문에 게재한 광고. 수선(水先)은 도선(導船)의 일본식 표현이다. 그러니까 3인의 인천항 도선사 중에 2명이 일인, 나머지 유일한 도선사가 한국인 유항렬 선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왼쪽)
▲ 인천수선조합(仁川水先組合) 광고. 1939년 4월29일 일본어 신문 조선신문에 게재한 광고. 수선(水先)은 도선(導船)의 일본식 표현이다.
그러니까 3인의 인천항 도선사 중에 2명이 일인, 나머지 유일한 도선사가 한국인 유항렬 선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왼쪽)
▲ 삼신기선 광고. 1931년 10월 조선신문에 게재한 삼신기선 광고. 사장 유진식과 부회 의원과 상공회의소 의원의 직함을 가진 전무취체역 김종섭이 나란히 이름을 보이고 있다.(오른쪽)
▲ 삼신기선 광고. 1931년 10월 조선신문에 게재한 삼신기선 광고. 사장 유진식과 부회 의원과 상공회의소 의원의 직함을
가진 전무취체역 김종섭이 나란히 이름을 보이고 있다.(오른쪽)

동사(同社)는 거금 20년 전에 강화의 교통기관이 불편함을 절실히 느낀 바 있어 현 사장 유진식 씨가 단독으로 삼신상회라는 간판으로 경영하여 오던 바 가속도로 불과 5, 6년 내에 발전을 거듭하여 대정 12년(1923년)에 자본금 20만 원으로 삼신기선주식회사를 창립하고 본점을 강화 읍내에 두고 지점을 인천에 둔 동사의 영업은 여객 수하물 운송으로 여객 발동선이 철선(鐵船) 갑성환(甲城丸)을 위시하여 7척이며, 승합자동차가 7대, 택시 12대, 화물차 3대이며, 부속 국유철도 연락까지 완전무결하다 하며, 종업원은 사원 70명, 선장 8명, 운전수 12명, 합 90명으로 매일 평균 수입액은 약 5백 원 내외이고 종업원의 급료 일액(日額)은 3천5백여 원이라 한다.

그러나 1924년 무렵, 인천에 있는 일인 경영의 전중기선(田中汽船)과 혈투라고 할 만큼 치열한 노선 경쟁을 펼쳐 “실장(失杖)한 맹인적(盲人的) 상태의 비운”을 맞기도 한다. 바로 이때 등장한 인물이 알려진 김종섭이었다. 같은 신문기사 내용이다.

때마침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시대 추이에 적응한 전무취체역 김종섭 씨의 불철주야로 대대적 노력과 웅대한 포부로 악응고투(惡應苦鬪)를 거듭하여 전중기선과의 경쟁은 일소(一掃)되어 그 후에는 거대한 잉여금을 획득하여 종전의 모든 결손금으로 청산하고 오히려 5푼 배당을 하고 적립금까지 세우게 되는 기적적 호성적을 나타내어 동사는 장족적 발전을 이루어서 강화지방에 다시없지 못할 상당한 경제기관화 하여 회사원의 협동단결로나 외계의 신임으로나 전 조선에 수위를 자랑할 만한 운수회사이다.

강화노선 경쟁으로 촉발된 일인 전중기선과의 이른바 '똑딱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던 원동력은 신태범 박사의 지적 그대로 강화도민들의 합심이었다. 항구는 사람을 내되 바다만큼 품 넓고, 멀리 수평선 너머로 눈을 두는 선구적 바닷사람을 낸다.

/김윤식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