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루한 학문 배격하고 주자학 한계 뛰어넘다
▲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건(간)정록(乾淨錄)>. 선생이 북경에 머물렀던 4일간 기록이다. 북경에서 당대의 학자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주고받은 필담과 왕복 서찰이 담겨 있다. '건정후편'은 청조 문인들과 주고받은 서신 37통, '건정부편'은 역시 문사들과 주고받은 서신 85통이 수록됐다. 건정동은 지금의 베이징 서남구역 간징후퉁(甘井胡同)이다.

담헌은 주자의 견해에 거침없이 반기를 들 만큼 학문적 자세가 호방하였다. '소학문변(小學問辨)'에서는 주자가 덕(德)과 업(業) 나눈 것을 통박하기도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마음에 얻은 것으로 말하면 덕이요,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말하면 업이다. 그 실은 한 가지이니 안배·분석하여 도리어 변통이 되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주자의 학설을 배척하는 요지였다.

'항주 선비 엄성에게 글을 부치고 <중용>의 뜻을 묻는다(寄書杭士嚴鐵橋誠問庸義)'에서는 아예 주자를 맹신하는 속유들을 이렇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자를 존상하여 문로(門路)가 순정하나 중국처럼 너그럽고 활달하지 못하고 혹 범람박잡을 면하지 못합니다. 대개 기(氣)가 치우침으로 앎이 국한되고 앎이 국한되므로 지킴이 확고합니다. 지킴이 확고하기에 반드시 지키지 않을 것도 애써 감추어주고 억지로 이해하려 들지요. 이게 그 단점이 있으면 반드시 장점이 있고 장점이 있으면 반드시 단점이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속유(俗儒)들은 명분만 따르기에 마음과 입이(뜻과 말이) 서로 어그러져 그 주자 문하에 비위를 맞추는 신하가 되지 않는 사람이 적습니다.” 위 문장 앞에 선생은 이런 말을 한다. “주자가 경전을 풀이할 때 '차라리 느슨하게 성길지언정 빽빽하지 말며, 차라리 졸렬할지언정 교묘하지 말라(寧疎勿密 寧拙無巧)'고 하더니, 실질적으로 주자가 경전을 풀이한 것을 보면 간혹 빽빽함에 치우치고 교묘함이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주자가 말한 경전 풀이 방법론과 실상 풀이해놓은 것은 다르다는 말이다. 당시는 주자의 해석 하나만 건드려도 사문난적(斯文亂賊, 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으로 예사로이 몰릴 때다. 당시 내로라하는 학자인 윤휴(尹鑴, 1617-1680)조차 주자의 <중용장구> 주석을 무시하고 새 주석을 냈다는 이유로 송시열 등에게 사문난적이라 지탄받았다. 그런데도 선생은 주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주자 문하에 비위를 맞추는 신하(朱門容悅之臣)”라고까지 모욕하니, 학문하는 이로서 매우 담대한 발언이다. 이러한 담헌 홍대용의 생애를 일별해 본다. 담헌(湛軒, 즐거운 집)이라는 당호(堂號)로 알려진 홍대용, 그의 자는 덕보(德保), 호는 홍지(弘之)이다. 선생은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장명 마을에서 태어나 천안에서 평생을 살았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당파는 노론에 속했다. 대사간 홍용조(洪龍祚)의 손자이며, 목사(牧使) 홍역(洪櫟)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청풍(淸風) 김씨 군수 김방(金枋)의 딸이고, 부인은 이홍중(李弘重)의 딸이다.

선생은 12세에 이미 과거에 대한 뜻을 접었으니 과거를 본들 합격할 이유가 없었다. 선생은 <담헌서> 외집 권1, 항전척독, '여문헌서'에 그 심경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용(容, 홍대용 자신)은 십 수 세 때부터 고학(古學)에 뜻을 두어 문장이나 짓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고루한 학문을 아니하기로 맹세하고 군무와 국정을 아우르는 학문에 마음을 두었다. 과거는 여러 번 보아도 합격하지 못했다.”

20세인 1750년 선생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1702-1772)에게 20세 전후부터 25세 정도까지 수업을 하였다. 김원행은 청음 김상헌과 농암 김창협의 현손이었다. 이들은 당시 내로라하는 주자학자들이었다.

24세인 1754년, 석실서원(石室書院, 김상용·김상헌을 모신 서원)에서 <소학> '명륜장(明倫章)'을 강하였다.

35세인 1765년, 계부 홍억(洪檍, 1722-1809)의 연경사행(燕京使行)에 수행원으로 따라갔다. 이 시절에 서학을 공부하였다.

36세인 1766년, 연경에서 엄성(嚴誠)·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 세 사람을 만나 의형제의 사귐을 맺었다. <담헌서> 외집 권1, 항전척독(杭傳尺牘), '여구봉서(與九峯書)'에 이들과 만남이 기록되었다. (<건(간)정록(乾淨錄)>도 이때 기록이다.)

42세인 1772년, <장자>를 읽고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말줄기를 발맘발맘 따라잡으면 영락없이 묵자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이다. 당시 유자로서 <장자>를 읽고 묵자를 가까이한다는 것은 사문난적이 됨을 자처하는 불순한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선생의 <을병연행록> 권 1, 을유 십이일 초이일 '경성서 이발하여 고양 숙소하다'를 보면 “여름 버러지는 족히 더불어 얼음을 말하지 못하고 고루한 선비는 족히 더불어 큰 도를 논할 수 없다”는 <장자> '추수(秋水)' 구절도 보인다. 주자학에 머물지 않으려는 선생의 학문 세계를 두루 짐작할 수 있다. 아래는 <담헌서> 외집 부록, 건곤일초정 제영, '소인(小引)'에 보이는 글이다.

“추호(秋毫)가 크고 태산이 작다” 한 것은 장주의 과격한 이론인데 내가 지금 천지를 하나의 풀로 엮은 정자로 여기니, 장차 장주의 학문을 하려는 것일까? 30년 성인 글을 읽었는데 내가 어찌 유학을 버리고 묵자학으로 들어갈 것인가? 쇠퇴한 세상에 살면서 상실된 위신을 보자니 눈이 찌푸려지고 마음 상함이 극도에 달하였다. 아아! 만물이나 내 자신이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인 줄을 모른다면 어찌 귀천과 영욕을 논할 수 있을 것인가? 갑자기 생겨났다가 갑자기 죽어가 마치 하루살이가 잠시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만두어라, 한가로이 이 정자에서 누웠다가 자다가 하다가 앞으로 이 몸을 조물주에게 돌려보내리라.”

44세인 1774년, 음서로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에 선입되었다.

45세인 1775년, 낭관(郎官)으로 벼슬이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토목·건설을 맡는 선공감의 9급 벼슬)이 되었다.

46세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고 47세인 1777년, 정조 원년 7월에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제수되었으며 50세인 1780년, 정월에 영천군수(榮川郡守)로 벼슬이 올랐다.

53세인 1783년 10월,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연암과 약속한 대로 반함(飯含, 염습할 때에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이나 쌀을 물림. 또는 그런 절차)을 하지 않았다. 반함을 하지 않은 이유는 '꼬바른 삶을 사는 유자로서 낯 뜨거운 짓'이기 때문이라 했다. 선생은 고향 마을 장산리에 부인과 합장되었다.

담헌 홍대용, 가장 친한 벗인 연암 박지원은 선생을 천하지사(天下之士)라 하였고 선생의 호 '담헌'은 '즐거운 집'인데, 천하 선비인 선생의 삶이 18세기 조선땅에서 즐거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