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요즘 신문 보기가 겁난다. 평검사회의를 통한 검사들의 집단행동이 이어지고 있기에 그렇다. 안 그래도 무서운 검찰이 집단행동까지 벌이니 소시민들은 몹시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우려했던 코로나 3차 대유행이 현실화돼 사회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검란(檢亂)'이라는 섬뜩한 말이 공공연히 나도니 마음은 벌써 한겨울이다.

추미애 법무부장관의 '윤석열 검찰총장 직무정지 조치'에 대한 검사들의 집단반발이 전국 검찰청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25일 시작된 평검사회의가 27일까지 전국 18개 지방검찰청에서 진행되었다.

검사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요지는 “윤 총장에 대한 직무정지 조치는 검찰 독립과 중립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자 법치주의 훼손”이라는 것이다.

검찰 역사에서 평검사들이 집단행동을 한 크고 작은 검란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규모가 전과 비교가 안돼 사상 초유의 검란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더욱이 이번에는 검찰 간부들까지 집단행동에 가세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검찰에서 평검사회의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느냐는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가 않다. 법에 검사 개개인은 국가기관이라고 명시돼 있는 점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평검사들과의 대화를 가졌다가 그들의 당찬 기세에 망신을 당한 바 있다. 평검사회의가 검찰 최대 의사결정 모임라고 해도 큰 과언은 아니다.

1999년에 처음으로 개최된 평검사회의는 의견수렴 장치처럼 비춰졌으나 갈수록 위상과 영향력에 탄력이 붙어 '검찰의 무기'로 변질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회의 결과가 내부용보다는 정부나 검찰 수뇌부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된 전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에는 수뇌부와 동일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검사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져볼 생각은 없다. 하지만 검사들이 집단행동이라는 방식 말고는 자신들의 뜻을 피력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국민들은 집단행동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2000년대 들어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고 이해관계가 복잡다단해지면서 계층, 분야, 지역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집단행동이 빚어지고 있다.

심지어 코로나 사태라는 엄중한 국면에서도 의사, 돌봄전담사, 노조 등이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행동을 벌여 국민들의 고개를 젓게 만들었다. 이 와중에 준법의 보루임을 자처하는 검사들마저 집단행동을 하는 모습은 보기에 좋지 않다. 불법파업 등의 집단행동을 엄단해온 검사들이 집단행동으로 비춰지는 행위를 통해 주장을 관철하려는 것은 자기 모순이다.

검사들은 정권이 검찰개혁을 이유로 검찰을 예속•통제하려고 시도해집단행동으로 맞서게 됐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저항하는 명분이 있다고 해서 절차적 정당성이 담보되고 집단행위가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검사들이 왜 집단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강변하기 이전에, 이 시기에 과연 극단적인 집단행동이 적절했는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굳이 평검사회의를 통해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 말고도, 검찰 내부 통신망을 통한 의견 표출이나 성명 발표 등으로도 자신들의 입장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검사는 '무사'에 비유되는 경우가 많다. 이명재 전 검찰총장은 퇴임식에서 “무사는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은 쬐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고, 언론의 검찰 인사평에는 '칼잡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진정한 무사는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다. 칼은 자신을 보호하는 것보다 대의를 위해 쓰여질 때 평가받는다. 정권이 검찰을 핍박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조국 사건 등에서 보듯이, 검찰이 지나치게 칼을 휘두른 것에 대한 업보라는 측면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