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초대석] 1호 탈북작가 선무
[금요초대석] 1호 탈북작가 선무
  • 박혜림
  • 승인 2020.11.26 19:31
  • 수정 2020.11.26 19:31
  • 2020.11.27 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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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의 밤은 북에 있다

-두려움
한국 온 지 18년됐지만 낯선 시선에
모자와 선글라스 없인 외출 못해
밤마다 북에 있는 꿈 … 아침 돼야 안도

-그리움
남쪽에서의 치열했던 삶 바탕으로
독창적 '프로파간다' 작품 그리다가도
향수 어린 이야기로 염원·희망 꺼내

-통일의 꿈
신분 숨겨야 했기에 지은 가명
38선 사라지길 바란 '선이 없다' 의미
지금껏 본 남한의 통일 … 정치로 변질
더는 '우리' 아닌 '나의 소원'이지만
소주와 대동강맥주 섞어 마실날 기대
▲ ▶ 얼굴 없는 탈북화가 선무가 17일, 파주 아트센터 화이트 블록에서 개인전 ‘내게 날개가 있다면’을 개최하고 남·북 정상의 초상화를 대형 작품으로 그려 낸 ‘지도자 시리즈’ 앞에 서있다. /김철빈 기자 narodo@incheonilbo.com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미키마우스, 붉은 스카프를 둘러멘 조선소년단 어린이가 어깨동무하며 환하게 웃는다. 발그레 해 진 두 뺨에 눈시울을 붉힌 손녀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를 들고 북에 있을 할머니를 그리워했다. 시뻘건 두만강 위로 고개만 내민 얼굴은 온통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평화, 통일, 그리움, 이데올로기적 두려움까지… 선무는 그렇게 남북을 가른 억센 철조망을 붓으로 하나하나 끊어냈다. 17일, 1호 탈북화가 선무를 평화가 마주 보이는 파주 아트센터 화이트 블록에서 만났다.

#내게 날개가 있다면

작가 선무에겐 깊게 눌러쓴 모자, 마스크와 선글라스 없는 외출이 여전히 두렵다. 18년 전, 한국에 왔지만 낯선 주변의 시선들과 북에 남아 있을 가족들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가 그려 낸 화폭 속 작품들은 거칠 것이 없다. 그의 염원, 희망, 진솔한 감정들을 캔버스 위에 과감하고 강렬한 붓 터치로 새겨갔다. 파주 아트센터 화이트 블록에서는 올해로 15번째 열린 선무 작가의 개인전 '내게 날개가 있다면' 전시가 한창이다. 이번 개인전 '내게 날개가 있다면'은 '탈북화가'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남한에서 사는 작가 선무의 치열한 삶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탈북 후 중국과 라오스에서 신분 없이 살며 겪었던 일, 가정을 이룬 한 가정의 아버지로 바라본 아이들의 모습, 남한 민주주의의 상징이 된 촛불시위, 화가로서의 삶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의 삶까지 다양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문득 하늘을 나는 새를 보다 내게도 날개가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저 국경 없는 새들처럼 그리운 얼굴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아 이번 전시회를 열게 됐습니다.”

전시는 선무의 독창적 예술 형태가 돋보이는 프로파간다(정치 선전)적 작품을 비롯해 조선화 기법이 담긴 향수 어린 작품들로 채워졌다. 또 2014년 중국 북경 원전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홍·백·남'에서 중국 공안에 압수당했다 어렵게 되찾은 작품들도 걸개그림 형식으로 설치해 보여준다. “관람객들이 바닥에 깔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름을 밟아야 입장할 수 있는 구조로 전시를 열었죠. 당시 북한 직원들과 중국 공안들이 들이닥치면서 그림들이 모두 압수되고 말았습니다. 이 중 일부 작품을 되찾아 이번 전시회를 통해 공개하게 됐습니다.”

#썩어빠진 자본주의

북한의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선무는 1998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북한체제에 대한 환멸보다는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중국으로 탈북을 시도한 선무는 주로 담뱃일이나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머지않아 이렇다 할 신분이 없던 그는 북에서도 중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2년 넘게 신분을 숨긴 채 살면서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고 생각이 들었죠. 난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이고 내 이름이 있는데 내 이름을 가지고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때 남한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무작정 라오스로 향했습니다.”

선무는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2001년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으로 가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덜렁 지도 한 장만 손에 쥔 채 하염없는 길을 걸어갔다. “지도 한장 놓고 한 치 앞도 모르는 길을 걸어야 했죠. 정글이나 사막 같은 곳을 지나면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친구들이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했지만 북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 내 길 가다가 죽는 게 낫겠다 싶었죠. 절박함이 있을 땐 우유부단한 생각들은 도움이 되지 않더라고요. 옳다고 생각되면 나아가는 게 저의 철칙이기도 하니까요.”

어렵사리 밟은 한국땅은 모든 것이 낯설었고 남쪽 사람들의 행동과 말들은 하나같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태국에 머물 때 남한 사회는 지연, 학연, 혈연 없이는 버텨낼 수 없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이중 다른 건 내가 잡을 수 없는 것들이지만 학연은 내 힘에서 해볼 수 있지 않겠냔 생각이 들었죠. 국가와 학교의 도움을 얻어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게 됐고 북에서 배웠던 미술 공부를 남한에서도 이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또래가 아닌 한참이나 어린 학우들과 공부를 하는 일이 선무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서슴없이 담배를 피우던 학우들의 모습이나 그 어떤 제재 없이 술을 먹는 모습은 북에서는 보지 못한 낯선 풍경이었다. “북에 있을 때 남한 사회가 자본주의에 썩어 빠져 있다는 얘기들을 심심치 않게 들어왔죠. 술.담배를 아무 곳에서나 당당하게 하는 것이 상당히 충격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북에서는 칠순 노인 정도나 가능할까 담배나 술이 허용되지 않다 보니 아, 이게 북에서 말하던 썩어빠진 자본주의구나 싶었죠(웃음) 수강 시간표 하나 내 마음대로 짤 수 없었던 북한 대학들과는 달리 주체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예술가에게 주어진 자유가 놀랍기만 했습니다.”

#나의 소원은 통일

신분을 드러낼 수 없던 그에겐 본명 대신 가명이 필요했다. 선무라는 이름은 '선이 없다'는 의미로 지은 가명이다. “대학교 재학시절 작품 활동을 하려면 이름이 필요하겠더라고요. 당시 교수님이 '무 대가리로 지어라'라며 우스갯소리로 던진 농담에 '없을 무'를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38선이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선'을 붙이게 됐죠. 그렇게 선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됐습니다. 물론 나중에 예술을 하는데 선을 긋지 않고 영역을 넓혀 가겠다는 의미를 덧붙이긴 했지만요.”

벌써 북한을 떠나온 지 18년째. 여전히 그의 밤은 북한에 있고 아침에 눈을 뜨고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쉰다고 했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항상 북한에 있던 때의 꿈을 꿔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때야 내가 남한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하죠. 여전히 두려움 가득한 윗동네지만 저에겐 항상 그립고 또 그리운 곳이기도 합니다.”

작가 선무의 소원은 조국의 통일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일 줄 알고 넘어온 남한 땅은 선무가 그리던 세상과는 많이 달랐다. 오래도록 굳어진 이데올로기적 이념 갈등에 통일은 정치적으로 변질된 지 오래고 '우리의 소원'이 아닌 '나의 소원'만이 남아있었다. “사실 남한에 오면 통일을 누구든 원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참 잘못된 생각이었고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통일을 원하는 사람들 간에 대립 갈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죠. 흡수 통일을 꿈꾸기보다는 우리에겐 교류를 통해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의 작품 '폭탄주'에는 우리나라 대표 브랜드 소주와 대동강 맥주가 나란히 놓여있다. 통일이 오는 순간 이 한반도의 대표 술을 섞어 폭탄주를 마시고 싶다는 선무의 바람이 담겼다. 그는 언젠가 마스크도 선글라스도 깊게 눌러 쓴 모자도 모두 벗어버리고 평화가 찾아온 한반도를 안주삼아 술잔 기울일 날을 고대하고 있다. “조국 통일이 오는 날 평양에서 소주 한잔합시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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