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화계 “지금 위치 아니다”
고증절차 없이 사람 편의 위해 설치
서쪽 아닌 계양산 방향 남쪽 확인
학술조사 원형복원 필요성 제기
사적 제202호인 김포장릉(김포시 풍무동·사진) 출입구가 릉(陵)을 기준으로 지금의 서쪽이 아닌 펜스로 출입이 통제된 계양산 방향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걸맞는 원형복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9일 김포장릉 관리사무소 등에 따르면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생부인 원종과 그의 비 인헌 황후 구씨의 능으로 양주에 있던 묘를 1627년(인조 5년) 김포로 개장하면서 쌍릉으로 조성돼 1970년 5월 사적 제202호로 지정됐다.

정자각, 홍살문, 재실, 수복방, 연지 등의 시설을 두고 있는 장릉은 유교적, 풍수적 전통을 기반으로 한 건축과 조경 양식,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제례 의식 등이 높게 평가돼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러나 지역 문화계 인사들 사이에서 주차장과 연결된 지금의 출입구가 애초 능을 조성하면서 만든 출입구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학술조사를 통한 원형복원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정현채 김포문화원 사무국장은 “장릉 조성 당시 출입구는 문화재 구역인 장릉과 사유지 간 경계에 설치된 펜스로 가로막힌 계양산을 바라보는 장릉 저수지 옆 길 쪽에 있었다”면서 “현재 능 서쪽에 있는 재실 앞으로 난 길과 연결된 출입구는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조선시대 왕릉 입지 조건에 반한 지표조사나 고증 절차 없이 능 관람 편의만을 위해 설치됐다”며 원형복구 필요성을 제시했다.

문화재청 장릉관리사무소 역사문화관도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관계자는 “장릉 저수지 옆 남쪽으로 난 산책로에 지금도 출입구 터가 남아 있다”며 “지금의 출입구는 김포시청(사우동)에서 장릉공단(풍무동)을 연결하는 길이 뚫리면서 남쪽인 풍무동 유현사거리까지 멀리 돌아가지 않고 장릉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또 “조선 왕릉은 왕은 남, 신하는 북쪽을 바라보게 설계돼 릉까지 오르는 신도가 남산에 해당하는 남쪽인 계양산을 향하게 돼 있지만, 지금은 출입구가 옆으로 치고 들어오는 형상”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도 장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출입구 원형복원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원앙(천연기념물 제327호) 등 천연기념물 등이 장릉 경내에 조성된 저수지를 먹이터로 이용하면서 이 계획은 장기 사업으로 미뤄졌다.

1만247㎡ 규모의 장릉 저수지는 인천시 서구 검단면 원당리 일대 농경지 용수 공급을 위해 1965년에 조성됐다.

김용남 장릉 관리사무소 팀장은 “지금은 저수지가 농업 용수원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2001년 처음 발견된 원앙이 지금은 200여 마리 정도가 찾고 있어 탐조객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포=권용국 기자 ykkwu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