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해운사 꿈꾸던 사람들, 쓰라린 아픔 맛 보다

 

 

광통사, 우경선이 일인 선박 빌려 설립
영업부진에 일인 동업자에 회사 넘어가

서울 대흥회사 … 미국인 배 구입해 시작
경영난에 배 팔았으나 10%밖에 못 받아
설립자 이병선 재산 차압당하는 처지에
미·독 영사관 빚 상환 요구 … 외교 문제로

관영 이운사 사장 탐관오리 민영준
사욕 채우기 급급 … 경영난에 사라져

이윤용 협동우선회사를 등에 업고
정치국, 인천항 협동기선회사 설립
일본에 협조한 공로로 훈장받기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 손에 넘어가

 

개항과 더불어 '바다 건너 저쪽'을 의식하기 시작한 조선인 선각들이 제물포항을 벗어나, 밖으로 통하기 위한 배를 스스로 마련하려다가 일본인 사기꾼의 농간에 선박 구입대금 12만냥이라는 거금을 고스란히 날린 웃지 못 할 실화는 본 연재 서설(序說) 2회째에 소개한 바 있다.

개항장 제물포에 외국의 기선이나 신속 견고한 대형 범선이 들고나며 물자의 운송을 모조리 손에 틀어쥐는 데 대해 분연히 자주 해운(自主海運)에 대한 의지를 세우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 이 같은 쓰라린 곡절을 겪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이 글에서는 개항 후 인천항에서 해운업을 일구어 상권 수호에 나서려 했던 선구적 인물들의 발걸음을 좇아 기록해 보려 한다.

인천항에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해운회사는 개항 14년 후인 1897년 외리(外里)의 광통사(廣通社)가 시발이었다. 물론 이보다 앞서 대동상회(大同商會)나 선상회사(船上會社) 같은 상회사가 인천항에 설립되었지만, 객주업을 주로 하면서 소형 재래 선박에 의한 근거리 연안무역에 종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 1897년 2월16일 독립신문에 실린 광통사(廣通社) 광고문이다. 정부 소속 윤선(輪船) 해룡호(海龍號)를 1만 원에 새로 사서 기왕의 경제호(慶濟號)와 함께 연안 정기 항로를 열어 ‘물화를 편리하게 운수’하리라는 내용이 보인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광통사는 우경선(禹慶善)이 설립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개항 후 인천항에 거주하던 일인 해운업자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의 선박을 빌려 합작 설립한 회사였다. 우경선은 인천항 경찰관을 지낸 까닭에 인천 현실을 비교적 잘 알았을 것이고, 더구나 1893년 1월에 수상운송업을 목적으로 하는 이운사(利運社)를 민영준(閔泳駿), 정병하(鄭秉夏)와 더불어 설립해 사무 일체를 맡아 했던 경험이 있는 터였다.

그래서였는지 창립 초기 3∼4년간 광통사는 제법 호성적을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영업부진으로 회사는 1901년에 동업자였던 호리의 손에 홀랑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경영이 부진한 데에는 어쩔 수 없는 요인들이 있을 터이나, 근본적인 것은 자본력 부족에다가 선박과 운항 기술을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해 있었다는 점이었다. 국사관논총(國史館論叢) 제53집 「인천과 부산의 해운업」은 당시 조선 해운업의 그런 약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미 모든 기선회사에서 도입한 기선이 모두 일본에서 건조된 것이고 고용하는 항해사나 기관사도 일본인으로 충원되어 선박과 선박 운항 기술을 전적으로 일인에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인과의 동업은 매우 위험하였던 것이다.

▲ 1895년 이운사(利運社)가 문을 닫으며 소속 선박이었던 화륜선 현익호(顯益號)를 인천항 독일인 상회인 세창양행(世昌洋行)에 운영을 맡겼다. 현익호의 연안 운행을 알리는 이 광고는 1897년 12월 23일자 독립신문에 실려 있다.

인천에 설립된 회사는 아니지만 선구적인 민간인 해운회사가 서울에 본사를 둔 대흥회사(大興會社)였다. 1886년 8월 이병선(李丙善), 김동헌(金東憲), 김범식 등이 우리나라 최초의 기선해운회사를 의욕적으로 설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차입금으로 미국 배를 구입했고, 일인 선원 7명을 고용했는데 역시 경영난으로 급료는 물론 미상환 선가(船價) 독촉을 받는다. 배는 모 미국인과 인천의 세창양행으로부터 빚을 얻어 샀던 것이다. 결국 1년여 만에 배를 공매 처분하지만, 전 선주인 미국인 레이크라는 자의 책략에 말려 원래 가격의 10분의 1 금액에 낙찰되어 채무를 상환하지 못함으로써 이병선은 재산까지 차압당하는 처지에 빠진다.

이 사태는 미국과 독일영사관에서 우리 정부에 빚 상환을 진정하는 등 외교 문제로까지 번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인천항감리에게 이 사건이 7개월째에 이르고, 4차례에 걸쳐 재촉했는데도 해결이 안 되니 놀랄 일이라며, 이병선을 즉시 압송할 것을 명하는 내용이 『인천항관초(仁川港關草)』 1888년 12월 12일자에 나온다.

자본과 선원의 항해술, 또 운송 물자의 확보 등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 회사 역시 단명에 그치고 만 것이다. 다만, 이런 정황으로 보아 대흥회사의 선박, 대흥선(大興船)이 인천항을 모항(母港)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렇게 대흥회사가 최초의 민간 기선회사였다면 위에서 언뜻 언급한 이운사는 최초의 관영 해운회사라고 할 것이다. 정부에서도 해운의 필요성, 중요성에 눈을 뜬 결과 인천항에 해운회사를 두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다른 화물보다는 각 항구의 공미(貢米) 운송에 치중해 상업적 이득이 적었던 데다가, 민 황후의 먼 척족으로 대표적인 탐관오리 민영준이 사장으로 앉아 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했던 까닭에 이내 경영난에 봉착하고 말았다.

결국 동학란 발발로 문을 닫게 된 이운사는 선박을 일본우선주식회사(日本郵船株式會社)에 위탁하여 연안 정기 항해를 시도했다가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계약을 파기하고 해관 총세무사에게 관리를 맡기면서 역사에서 영영 사라지고 만다.

민(民)이든 관(官)이든 해운업을 하는 족족 실패로 돌아간 이유는 앞에서 말한 바 있거니와, 조선조를 거쳐 구한말 정부의 국제 사정 및 행정·경영에 대한 무지와 빈약한 자본, 오리(汚吏) 무리들과 외국인의 술수, 민간의 몽매(蒙昧)가 겹쳐진 까닭임을 쓰라린 마음으로 다시 되새기게 된다.

이런 중에도 말년까지 인천 사람으로 남은 해운업자가 있다. 협동기선회사(協同汽船會社)를 설립한 부산 초량 객주 출신의 정치국(丁致國)이다. 그는 애관극장의 전신인 협률사(協律舍)를 연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 정치국(丁致國). 1899년 2월, 인천항에 협동기선회사(協同汽船會社)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부산 출신으로 일찍이 인천항에 이주하여 말년까지 경제인으로 크게 활약했다. 애관극장 전신인 협률사(協律舍)를 설립하기도 했다. /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협동기선회사는 '부산항에 사는 정치국이 1899년 2월에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해 황성신문 2월 18일자에 그 사실이 보도되어 있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 회사조합 자료에는 본점 소재지가 인천으로 되어 있다.

이어 1900년 6월 13일자 황성신문은 찬정(贊政) 이윤용이 협동우선회사(協同郵船會社)를 인천항에 열었다고 쓰고 있다. 세력가 이윤용을 등에 업고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사장 대변(代辨) 안영기(安永基), 그리고 그 밑에 총무가 정치국이다. 그러나 이 협동우선도 일본인 호리상회, 대판상선회사 등과의 치열한 경쟁을 이기지 못한 채 끝내 영업 부진에 빠지고 러일전쟁 후 일인의 손에 넘어간다.

▲ 협동우선회사(協同郵船會社) 설립에 관한 1900년 6월 13일자 황성신문 기사이다. 의정부 찬정(贊政) 이윤용(李允用)이 이 회사를 설립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정치국(丁致國)의 협동기선을 확장해 재 설립한 것으로 보인다.
▲ 1900년 9월21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대한협동우선회사(大韓協同郵船會社) 윤선(輪船) 운항 광고이다. 창룡호(蒼龍號), 현익호(顯益號) 두 배 이름만 간단하게 광고하고 있다.
▲ 이 역시 1902년 10월 31일자 대한협동우선회사 광고이다. 인천항을 기점으로 소속 증기선 5척의 운항 시각과 각 행선지를 알리고 있다.

정치국은 그 후에도 인천 상공업계의 중추로 떠오른다. 1906년에 근업사(勤業社) 사장을 비롯해 1908년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 초대 회두(會頭), 1916년 일본인과 병합된 인천상업회의소 조선인 부회두 등을 거친다. 문화 예술, 교육 방면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타향 인천항의 해운업자로 앞서 역사를 걸어간 인물이었으나, 일본에 협조한 공로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중구 내동에서 운명했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