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운명·실력주의 사회 미리 내다보다
▲ 담헌 홍대용 초상: '홍고사대용(洪高士大容)'선생이 1766년 중국 북경에 60여 일간 머물 때 사귄 중국 지식인 중국인 엄성(嚴誠)이 그린 초상화다. 고사(高士)란, '인격이 고결한 선비'라는 뜻이다. 안온하고 단정한 눈매와 입매에 허리가 곧추섰다. 기록에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인물이 훤칠한 쾌남아였고 수염도 아주 보기 좋게 났으며 의기가 강하다'고 하였다.
▲ 담헌 홍대용 초상: '홍고사대용(洪高士大容)'선생이 1766년 중국 북경에 60여 일간 머물 때 사귄 중국 지식인 중국인 엄성(嚴誠)이 그린 초상화다. 고사(高士)란, '인격이 고결한 선비'라는 뜻이다. 안온하고 단정한 눈매와 입매에 허리가 곧추섰다. 기록에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인물이 훤칠한 쾌남아였고 수염도 아주 보기 좋게 났으며 의기가 강하다'고 하였다.

담헌 홍대용, 그는 담대한 학자였다. 선생은 영조의 국가정책인 탕평책까지 거리낌 없이 통박하였다. 당쟁을 막기 위해 당파간 정치세력 균형을 꾀하려 한 정책인 탕평책(蕩平策), 이 탕평책에 대한 선생의 견해는 탁견이지만, 영조나 정조 당대 권력자들에게는 매우 불손한 견해였다. 선생은 당시 탕평책이 '정사'(正邪)를 분명히 가리지 못한다며 <여채생서>(與蔡生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대개 논리는 발라야 하고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자칭 탕평을 주장하여 피차에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사(邪)와 정(正)을 혼란시키며 충(忠)과 역(逆)을 섞어서 마침내 인심을 괴란시키고 온 세상을 몰락하게 만들 것입니다. 붕당(朋黨)화는 물론 심한 것입니다만 탕평(蕩平) 화는 붕당보다 백배나 더 심하여 반드시 망국에 이르고야 말 것이니 오호라 두렵지 않겠습니까?”

선생의 이 말은 탁견이었다. 탕평책을 폈던 76년간의 영·정조 재위 기간이 지난 뒤 모든 당파가 힘을 잃었고 당연히 당쟁도 없었다. 그러나 순조 대부터 세도 정치가 강화되었고 105년 뒤인 1905년, 조선은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일본에게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안확(安廓, 1886-1946)은 그의 '<조선문명사>, 1923년에 발간된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체계적인 정치사 책으로 참고 도서만 8500권에 이른다. 총 6장 140절로 통사 형식의 서술로 조선 정치사를 세계 각국 정치 체제와 비교하였다. 안확은 이 책에서 조선은 서양과 달리 역사적으로 봉건 시대가 없고 고대 그리스처럼 부족자치제를 실시하는 등 동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선진적이면서도 독특한 형태라고 하였다.'

'제85절 당파와 정치발달'에서 당쟁의 폐해를 주장하는 견해에 대해 “그러나 내가 생각하니 근대 정치는 당파로 인하여 발달을 이루었는데도 오히려 당파가 진전하지 못하고 끊어지는 바람에 정치가 쇠퇴하고 말았다고 서슴없이 단언하는 바이다”라 하며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당파로 인하여 임금의 권한이 축소되고 신하의 권리가 신장되며 둘째, 인재의 다수가 등용되며 셋째, 당쟁 속에서 바른 길을 찾게 된다.' 안확은 당파가 오히려 정치를 발달시켰다고 주장한다. 당쟁이 없으면 모든 권한이 한 사람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안확이 조선 퇴락 시기를 정조시대로 상정하고 이때를 '독재정치 말기 1'로 규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탕평의 화가 붕당보다 무섭다”는 선생의 말을 귀담아들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도 우리는 붕당과 탕평을 악과 선, 그름과 옳음이라 교육하고 배운다. 붕당의 폐해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민사관도 배웠다. 지금도 우리는 한마음 한뜻 및 질서정연만이 옳고, 분열과 다툼은 그르다고 여긴다. 선생의 말을 통해 역사와 우리의 삶을 되짚었으면 한다. 정당들 사이에 다툼이 분분하고 사회에서 여러 가지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현상은 오히려 장려할 만한 일이다.

선생이 평생 추구한 학문은 실학이다. 그는 '<계방일기>(桂坊日記, 선생이 왕세자를 모시며 나눴던 대화를 일기 형식으로 묶은 책이다. 계방이란 왕세자를 모시는 곳이란 뜻이다.)'에서 구체적으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 1517-1578)과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하였다. 또 '미호 김 선생께 올린 제문'(祭渼湖金先生文)에서 자신의 학문에 대해 “일찍이 묻고 배우는 것, 진실한 마음(實心)으로 하는 것은 실용적인 일(實事)에 있으니, 진실한 마음으로 실용적인 일을 하면 허물이 적고 업을 성취할 수 있다 들었습니다”라 하였다.

이러한 선생은 신분에 대해서도 “무능하면 양반 자제라도 가마채를 메어야 하며 유능하면 농사꾼 자식이라도 관리가 되어야 한다”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였다.

연암 박지원은 “선생은 내 평생 벗이며 학문적 동반자였지만 서로 공경하기를 내외같이 하였다. 나는 담헌에게 땅이 돈다는 지전설(地轉說)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연암이 호주가였던 데 반하여 선생은 술을 한 잔도 못하였다. 선생은 과거를 일찍이 폐하였고 후일 선공감감역이란 첫 벼슬을 음직으로 받았다.

벼슬길은 영천군수로 마쳤지만 포의지사와 다를 바 없었다. 스승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이었다. 미호는 우암 송시열과 농암 김창협을 잇는 조선의 대학자였으며, 연암과 정철조 등도 제자로 삼았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
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