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구도(球都) 자존심 살린 인천고 야구
[썰물밀물] 구도(球都) 자존심 살린 인천고 야구
  • 이문일
  • 승인 2020.11.15 16:29
  • 수정 2020.11.15 16:29
  • 2020.11.16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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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일 논설위원

“서울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제43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인천고가 서울의 강호 선린상고를 4대2로 격파해 1954년 이후 35년 만에 뜨거운 감격을 누렸다. 인천고의 전국 제패는 1950년대에 찬란했던 구도(球都) 인천의 자존심을 회복했다.” 1989년 9월13일자 인천신문(인천일보 전 제호) 1면 머릿기사로 실린 내용이다. 이날 체육면과 사회면에도 '장하다, 인천고도 해냈다'란 기사를 통해 시민들과 함께 기뻐하는 모습을 내보냈다. 앞서 1988년 8월8일자 1면 톱으로 “인천 고교야구의 명문 동산고가 22년 만에 전국을 제패했다”고 보도했다. 7일 열린 제42회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동산고는 경기도 대표 유신고와의 결승전을 맞아 6대0으로 완승해 감격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는 기사다. 역시 체육면과 사회면에도 '장하다! 인천의 건아들'로 이어지며 시민들의 환호성을 실었다.

제21회 청룡기대회(1966년)를 마지막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지 못했던 인천의 고교야구가 다시 정상을 되찾은 데 대한 감격이었다. 침체의 늪을 벗어나 '구도 인천'의 재도약을 예고해 더욱 상징성을 띠게 했다. '인천인에 의한, 인천인을 위한' 기치를 내세운 본보에 모처럼 터진 낭보였다.

고교야구는 1980년대 초반 야구팬들의 관심이 프로야구로 옮아가면서 침체됐다. 그 전까지 고교야구를 향한 해당 지역 주민들의 열망과 기대는 정말 대단했다. 출신 학교를 떠나 고교야구를 응원하는 분위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소싯적 인천지역 고교야구팀을 응원하러 동대문구장을 찾았던 기억이 새롭다. 프로야구에서 '잘 나가는' 선수들도 결국 고교에서 키워지지 않았는가. 교교야구를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다.

'구도'라고 부를 만큼 인천인들의 야구사랑은 아주 크다. 개항(1883년)과 함께 야구와 인연을 맺은 인천엔 조선인들로만 구성한 한용단(漢勇團)이 있었다. 1920년 즈음에 결성된 경인기차통학생 모임이었는데, 야구팀으로 유명했다. 당시 웃터골에서 '한-일 야구전'을 연다고 하면, 시민 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경기 승부에 일본팀 편을 들어 일어난 '항일 민족투쟁'으로 1924년 해체되긴 했지만, 한용단에서 피어난 야구열이 결국 오늘날 인천야구를 키운 셈이다.

인천고총동창회가 지난 11일 송도컨벤시아에서 인천고의 제48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 축하회를 마련했다.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2일 열린 결승전에서 인천고는 서울고를 3-2로 물리치고 사상 처음으로 봉황대기 우승을 차지했다. 전국대회 우승은 16년 만이다. 그래서 후배들을 축하·격려하려고 행사를 개최했다.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등 많은 대회를 석권했지만, 유독 봉황대기와는 인연이 없었던 인천고. 1979년과 1996년 2차례 봉황대기 결승에 올랐으나, 준우승에 그쳤다. 이번 인천고의 봉황대기 우승이 코로나19로 침울해진 지역사회에 한가닥 빛을 비추었다고 하면 과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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