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상권 옹호 넘어 '애국심 고취' 앞장

조선 '상무회의소규례' 공포 따라
객주·민상·진신 합자한 상인조직

일본 상인 침탈에 맞서 시정 촉구
자주·자강 위해 학교 설립 노력도
일 압박에 해산 … 일반 단체 위축
박명규·서상빈 등 인물 기억해야

고관들은 참여했으나 후일 변절
현대사 한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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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항신상회사 상상도. 인천항신상회사는 1897년 1월 인천객주회의 주역 서상집과 박명규 등 객주, 민상(民商)들과 진신(縉紳)인 서상빈(徐相彬) 등이 합자 조직한 상인 단체였다. /사진출처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 인천항신상회사 상상도. 인천항신상회사는 1897년 1월 인천객주회의 주역 서상집과 박명규 등 객주, 민상(民商)들과 진신(縉紳)인 서상빈(徐相彬) 등이 합자 조직한 상인 단체였다. /사진출처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 객주 손성칠(孫星七). 개성 출신으로 1906년부터 인천에서 객주로 활동했다. 1909년 인천신상회사 부사장과 1913년 객주단합소 소장을 지냈다. /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객주 손성칠(孫星七). 개성 출신으로 1906년부터 인천에서 객주로 활동했다. 1909년 인천신상회사 부사장과 1913년 객주단합소 소장을 지냈다.
/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구한말 법부대신을 지낸 이하영(李夏榮)이다. 인천항신상협회 초기 사장을 역임했으나 후일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는 등 변절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라 있다. /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구한말 법부대신을 지낸 이하영(李夏榮)이다. 인천항신상협회 초기 사장을 역임했으나 후일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는 등 변절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라 있다.
/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인천객주회가 설립되어 민족 상권을 지키고 신장시키기 위해 진취적이고 혁신적으로 활동을 했지만, 그 조직이나 기능은 여전히 근대적인 상인 단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정부는 1895년에 상무회의소규례(商務會議所規例)를 공표했는데, 개항장의 상회사, 객주회 등을 통괄함으로써 좀 더 효율적으로 민족 상인에 의한 '상업 흥왕'을 꾀하려는 의도였다.

인천항신상협회(仁川港紳商協會)는 이 상무회의소규례에 의거해 1896년 11월(양력으로는 1897년 1월), 인천객주회의 주역 서상집과 박명규 등의 객주, 민상(民商)들과 진신(縉紳)인 서상빈(徐相彬) 등이 합자 조직한 상인 단체였다. 구성원 50여 명이 관리(官吏), 유지(有志) 같은 진신(縉紳)과 민간 상인, 객주들이었기 때문에 신상협회(紳商協會)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진신의 '신(紳)' 자와 민간 상인을 의미하는 민상(民商)의 '상(商)' 자를 취해 지은 명칭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진신과 평민 상인들이 함께 상인 단체를 조직하게 된 이유를 분명히 공표하지는 않았으나, 설립 당시 농상공부대신 이윤용(李允用)의 협회 장정 서문에서 그 진의(眞意)를 읽을 수 있다.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에서 그 구절을 옮긴다.

▲ 신상회사 장정. 당시 농상공부대신 이윤용(李允用)이 서문을 쓴 신상회사 규정집이다. 설립 명칭, 목적, 조직, 회원 구성 등과 운영 규칙을 정한 것으로 총 6관(款) 44조(條)로 구성되어 있다./사진출처=인천시립박물관
▲ 신상회사 장정. 당시 농상공부대신 이윤용(李允用)이 서문을 쓴 신상회사 규정집이다. 설립 명칭, 목적, 조직, 회원 구성 등과 운영 규칙을 정한 것으로 총 6관(款) 44조(條)로 구성되어 있다./사진출처=인천시립박물관

현재 고위 관리가 각국을 왕래하고 각국의 서적을 읽어 그들의 사무를 보고 익히며 그들의 시세를 집작할 수 있는 사람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상회(商會)로 돌아와서 모든 상인을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대하며 그들의 부족한 지혜를 일깨워 주며 옛날부터 물들어 온 좁은 소견을 타파시킨다. 이렇게 하여 상인들로 하여금 귀한 사람도 상회에 가입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면 상인의 권리는 자연적으로 완전케 되며 재용(財用)의 흥륭(興隆)은 물어볼 것 없이 기대할 수 있다.

이렇게 신상협회의 설립 정신은 직업의 귀천과 신분의 차별 없음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이 동일하다는 의식 위에서 지식 있는 자가 무지한 자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는 민주, 평등, 계몽사상이다.

후일 친일 행적으로 반민족행위자가 된 이윤용이지만, 당초 주장했던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정신은 1899년 10월, 개정된 인천항신상협회장정(仁川港紳商協會章程)에 명문화된다.

제2조 진신과 민상이 회의(會議)함은 상무(商務)를 귀중히 하며 재원(財源)을 흥왕케 함이라. 관인(官人)과 민상을 물론하고 상무에 개명(開明)키를 주(主)할 사(事).

이에 따라 인천항신상협회는 민족 상인들에게 상업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객주들이 모여 회사를 창설할 것을 장려함으로써 자본의 확충을 꾀하는 등 적극적인 계몽, 혁신 활동을 펴나간다. 물론 일본 상인들의 상권 침탈에 대해서는 정부에 그 시정을 촉구하거나 저들의 비위적 상행위를 규탄하고 대항한다. 1902년 6월1일, 우리 화폐 주권 침탈을 노려 일본 제1은행이 불법적인 은행권 유통을 자행할 때, 그에 대항해 일본은행권 수취 거부 결의를 한 것도 그 한 사례일 것이다.

이 내용은 제1은행장과 경인철도합자회사 사장을 지낸 시부사와 에이이치로(澁澤榮一)의 전기(傳記) 자료에 다음과 같은 그의 실토가 적혀 있다.

▲ 신상회사에서 인천항에 2세를 위한 학교를 세울 것을 논의하고 자금은 수백만 원이 들더라도 회원이 부담하기로 결정했다는 1906년 4월28일자 대한매일신보의 내용이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신상회사에서 인천항에 2세를 위한 학교를 세울 것을 논의하고 자금은 수백만 원이 들더라도 회원이 부담하기로 결정했다는 1906년 4월28일자 대한매일신보의 내용이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은행권이 발행되자 그 유통에 가장 좋은 결과를 보인 곳은 부산, 목포 방면으로서, 한인 모두 그것이 주고받기 편리하고 미려함을 좋아하여 발행액이 날로 증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경성, 인천에서는 일부러 이를 휴대하는 것을 피하는 기색이 있었고, 그 중에서 인천에서는 한인이 조직한 신상협회(伸商協會)와 같은 곳은 은행권을 수수하지 않기로 결의하기에 이르러 한때 유통이 몹시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다.

인천항신상협회는 우리 민족의 자주(自主) 자강(自彊)을 위해서는 오로지 신학문, 신지식의 교육을 통해서라는 신념 아래 인천항에 학교를 설립하기를 열망한다. 1906년 4월28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신상협회 회원이 모여 학교 설립에 관한 토론을 하는데, 자금이 기백만(幾百萬) 원이 든다 해도 각 회원이 모두 부담하기로 했다며, 인천항신상협회의 교육 열성을 크게 격려하고 있다.

서상빈이 주동해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제녕학교(濟寧學校)와 정재홍((鄭在洪)의 인명학교(仁明學校)에 대한 전폭적인 운영 지원은 바로 신상회사가 품었던 열망의 실현일 것이다. 이들 학교 관련해서는 차후 다른 지면에서 설명할 것이다.

▲ 1915년 10월 28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사진이다. 뒷줄 오른쪽 사람이 당시 농상공부(農商工部) 대신 이윤용(李允用)으로 1897년 1월 인천항신상협회가 설립될 당시 장정 서문을 쓴 인물이다. 앞줄 중앙의 여성은 이완용의 부인, 뒷줄 왼쪽은 조중응(趙重應)이다. 이윤용, 조중응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되어 있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15년 10월 28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사진이다. 뒷줄 오른쪽 사람이 당시 농상공부(農商工部) 대신 이윤용(李允用)으로 1897년 1월 인천항신상협회가 설립될 당시 장정 서문을 쓴 인물이다. 앞줄 중앙의 여성은 이완용의 부인, 뒷줄 왼쪽은 조중응(趙重應)이다. 이윤용, 조중응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되어 있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궁내부(宮內府) 대신으로 있다가 1906년 6월 인천항신상협회 사장에 취임한 이재극(李載克)의 후일 모습이다. 이재극 역시 일제에 붙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혔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궁내부(宮內府) 대신으로 있다가 1906년 6월 인천항신상협회 사장에 취임한 이재극(李載克)의 후일 모습이다. 이재극 역시 일제에 붙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혔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신상협회 장정 중 제7조와 제8조에는 특이한 내용의 조항이 들어 있다. 제7조 말미의 '국가 경일에는 국기를 달고 등불을 내걸으며, 모든 사원이 모여 잔치를 베풀고 축하함으로써 애국하는 성의(誠意)를 기르게 할 것'이라는 대목과, 제8조의 '국기 2천5백 장을 새로 제작해 경일(慶日)마다 각 고을에 나누어 주어 한 집도 거르지 않고 달아서 경사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표현하게 할 것' 같은 조항이다. 장정에 굳이 이 같은 조항까지 넣어야 할까 싶지만, 이를 통해 신상협회가 단순한 상업 부흥을 꾀하려는 모임만이 아니라 애국심 고취와 민족 단합의 장(場)이기도 했던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청일, 러일전쟁 후 조선 병탄에 거의 이르러서는 일제가 이 같은 신상협회의 모습을 그냥 둘 리 없었다. 특히 인천항에서의 미곡 유통의 주도권을 쥐고 '대금의 선불을 받지 않으면 일체의 곡물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을 결의하여 일본 상인들을 굴복시키기도 했던 신상협회는 1910년 3월, 수수료 징수 등이 상업 발전을 저해한다는 일제의 강변에 눌려 농상공부에서 마침내 해산 명령을 내린다.

신상협회는 신상회사로도 고쳐 불리었지만 결국 일본의 압박으로 진신, 유지들은 제외된 채 명의를 인천객주단합소(仁川客主團合所)로 바꾸어, 고작 수출 미곡 가격을 유지하는 정도의 동업자 단체로 위축되고 만다. 이 단체는 1917년에 인천물산객주조합(仁川物産客主組合)으로 또 다시 명칭을 바꾼다.

인천항신상협회에는 한국사에 이름이 보이는 고관들이 사장으로 참여했으나 후일 모조리 변절했다. 다만 박명규 같은 객주, 그리고 어지러운 개항시대를 걸어가면서 국가 상업 발전과 육영 사업에 진력한 선구적인 인물, 인천 태생의 성균관 진사(進士), 서상빈 같은 이를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