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석 경기본사 사회부장

오늘 이춘재가 처음으로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경기 남부지역 등에서 살인 14건과 강간 9건 등 희대의 연쇄살인을 했다고 자백했다. 이는 재수사로 입증된 것으로, 자백 상으로는 25건의 성범죄가 더 있다. 하지만 국민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재판부가 언론의 사진 촬영을 불허한 것이다. 첫 출석부터 베일에 가려지면서 그의 얼굴이 언제 공개될지, 아니면 영영 안될지 알 수 없게 됐다.

그가 피고인이 아닌 '증인' 신분으로 출석하기에 그렇다고 설명했다. 심리를 담당한 수원지법 형사12부는 지난달 26일 이춘재 8차 사건의 윤성여씨 재심 공판을 진행하면서 이춘재 얼굴 등에 대한 사진 촬영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재판부는 “이춘재가 피고인이 아닌 증인의 지위에 불과한 데다, 법정 질서유지 측면에서도 (사진 촬영이) 적절하지 않다”는 사유를 들었다.

피고인은 검사가 범죄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긴 사람을 뜻하는데 이춘재는 공소시효가 지나 재판에 넘겨질 수 없고, 그 범죄 역시 기소할 수 없기에 그를 피고인으로 세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춘재를 법정에 세울 유일한 방법이 '증인'으로 채택하는 것이다. 또 '법정 방청 및 촬영 등에 관한 규칙' 제4조에는 피고인의 동의가 있는 때에 한하여 재판장이 촬영을 허가할 수 있고, 예외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촬영을 허가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재판부가 촬영을 허가한다고 할지라도 '공판 시작 전'이나 '판결이 선고될 때'뿐이다. 공판이 개시된 이후 증인신문이 이루어지므로 촬영은 불가능하다. 즉 현재의 법 테두리에서는 그를 촬영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결론이다.

재판부의 결정이 아쉽다 못해 실망스럽기까지 한 것은 본인뿐인가. '법대로', '곧이곧대로' 엄격한 법의 잣대로 고심해서 내린 결정으로 보이지만, 나에게는 국민 알권리와 국민 법감정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판단으로 이해된다. 20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씨 재심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최소한 윤씨 앞에서는 이춘재를 '증인'으로 분류해서는 안된다. 그가 설령 법 테두리에서는 '증인'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춘재가 진범임을 실토하는 자리이지, 윤성여씨가 증인 도움으로 살인 혐의를 벗어내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재판부가 이춘재 촬영 불허 결정을 하기 11일 전인 10월15일 이른바 '코로나 장발장'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40대 절도 피고인에 법관의 재량으로 형량을 절반까지 낮춰주는 '작량감경'을 통해 징역 1년을 선고했다고 대내외에 알렸다. 이 사건은 지난 7월 선고가 예정돼 있었으나, 달걀 한판 절도에 검찰의 구형량이 18개월인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 BBC 서울 특파원이 자신의 SNS에 '세계 최대 아동 포르노 사이트를 운영한 손정우와 똑같은 형량'이라는 글을 올렸고, '사법불신'을 재확인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동종 전과가 9회 있고, 누범 기간에 타인의 건조물에 침입해 이 사건 범행을 저질렀다.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 범행한 경위를 참작하더라도 실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피고인의 범죄사실과 전과기록 등 피의사실을 친절하게 공표하면서 여론 진화를 의식한 듯했다.

'코로나 장발장' 실형선고 이틀 전인 10월13일. '법원 신뢰도 추락… 경찰과 순위 뒤바뀌어' 제목의 보도자료가 국감장에 뿌려졌다. 소병철 국회의원이 한국형사정책연구원으로부터 받은 '각 형사사법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추이' 자료를 분석한 결과, 법원의 경우 2012년에는 50.5%를 기록했던 신뢰도가 2020년에는 35.3%로 하락했다. 반면 가장 낮았던 경찰의 경우는 2020년 49.2%의 신뢰도를 보여 검찰과 법원을 앞질러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다행히도 법원의 국민 신뢰도를 수직으로 높일 방법은 있다. 바로 AI(인공지능)판사를 도입하면 된다. '코로나 장발장' 판결이 있던 10월15일. 'AI판사를 채용하여 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청와대국민청원에 올랐다. 귀에 딱지가 앉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얘기로 공정하지 못한 법원을 대체하자는 의견이다. 대법원이 발간한 '2020 사법연감'을 보면 지난해 전국 법원에 접수된 사건은 총 1772만328건이다. 판사 1명이 많게는 수백 건을 담당했다. 인공지능 도입으로 법원은 국민 신뢰도를 높이고, 판사는 업무 과중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국민 10명 중 3명만 신뢰하는 사법기관은 이미 국민으로부터 유죄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