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자유공원 일대 14만평
독·영·미·불 치외법권 울타리
일·청인도 비싼 지세 내고 거주
세창양행서 잡화 사들인 조정
큰 빚 지고 고리대금 당하기도
타운센드상회, 외상판매로
조선 상인에 큰 부채 안겨
의사 랜디스·타운센드상회 맥코넬
한국에 큰 애정가진 인물도 있으나
대다수 부 축적·친일 행각만 몰두
으리으리한 저택들 사라졌으나
제물포구락부는 아직 남아있어
각국조계는 서양 각국 사람들이 들어와 거주하던 지역이다. 조계지는 중구 송학동과 중앙.북성.송월동 일부에 걸쳐 14만여 평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으로 현재의 자유공원 일대라고 말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실제 그랬는지는 미상하나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 목 씨(穆氏)가 제물포에서 일인에게 아첨하고, 청인을 기쁘게 하고 난 “나머지 못한 땅으로 서양인 거류지를 삼았다.”고 썼다.(목 씨는 외부 고문 묄렌도르프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그들은 일인이나 청인들과 달리 응봉산에 저택을 짓고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각국조계의 초기 거주민은 몇 명 되지 않았지만, 당시 열강이라고 일컫는 나라 사람들은 다 들어와 살았다. 한국 병탄 이후, 1913년 일제가 조계제도를 폐지할 때까지는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치외법권의 든든한 울타리 속 별천지에서 거주민들은 부를 축적하며 안온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각국조계의 거주자들은 국적별로 독일, 영국, 미국, 불란서, 일본, 청국인이었다. 서양인 거주지였지만 협약에 의해 비록 비싼 지세(地稅)를 물고서라도 일인이나 청국인 정도는 들어가 살 수 있었다.
인천에 들어온 서양 상인으로는 개항 당년인 1883년 6월, 영국계 이화양행(怡和洋行)을 필두로 1884년에 독일 대상(大商) 세창양행(世昌洋行), 그리고 뒤를 이어 미국 거상(巨商) 타운센드상회가 송학동에 자리를 잡는다. 1896년에는 영국의 홈 링거양행과 광창양행(廣昌洋行)이 뒤를 이었다.
이들 모두의 상업 활동과 생활을 일일이 열거해 기록할 수는 없으나 대표적인 두 서양 상인, 곧 세창양행과 타운센드상회에 대해서는 한 번 살펴보고 넘어가자. 실제 이 두 무역상은 우세한 자금력과 상술로 서양 무역 상권을 쥐었음은 물론이고, 조선 조정에까지 금력(金力)을 휘두를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궐내에서는 세창양행을 통하여 서양 잡화를 무수히 사들여 빚을 매우 크게 졌고, 또 동궁이 별도로 각색 무용한 물건을 사들여 빚진 바가 또한 적지 않으며, 금년 8월경에는 세창양행 상인이 외아문(外衙門)으로 가 빚 갚을 것을 몹시 독촉하고 우리 정부에 인천의 세관을 잡힐 것을 강청하였다. 그때의 외아문 대리독판(代理督辦) 서상우(徐相雨)는 대답할 말이 없어 병을 핑계대고 쥐가 도망치듯 숨어버려 감히 나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외아문이 텅 비었다 한다. 한심스럽고 한심스럽다.
이 또한 1886년 10월19일자 윤치호의 일기 내용이다. 이미 몇 회(回) 앞의 글에서 언급한 바, 이 일기는 그가 갑신정변으로 인해 중국에 피신해 있으면서 쓴 것이다. 다음은 최성연 선생의 『개항과 양관 역정』의 내용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들은 구한국 말 깊은 궁중에까지 침투하여 왕의 친교와 총애를 입었다고 하는데 그 시절로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서구제(西歐製) 유리꽃병을 선물하는 대가로 어마어마한 납품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몇 만 불 혹은 몇 만 파운드(磅)의 대금(大金)을 궁중 혹은 정부 상대로 고리대금을 하고는 똠방똠방 원리(元利)를 받아내었다는데 일정 기간 중 인천해관세(仁川海關稅)에서 이를 직접 회수하였다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전하고 있다.
지금 어느 글이 정확한지를 가리는 것은 실로 무용(無用)한 일이다. 오직 일개 무역상인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떨친 엄청난 금력과 위세를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타운센드상회는 수입품 외상판매, 수출 곡물 자금 선대 등에 의하여 많은 조선 상인들과 채권 채무 관계를 맺었고, 이는 조선 상인의 계약 위반으로 인하여 많은 외채 분쟁을 불러 일으켰다. 1892년 4월 미국공사를 통해 타운센드가 제출한 조선인 부채자 명단과 부채액을 보면, 수원·개성·인천·성천 등지의 상인이 도합 엽전 7만 9000여냥, 은화 893원을 미상환한 상태였다. 이는 전술한 바 1885∼1894년간 조선 상인이 일본 상인에게 미 청산한 부채액의 반을 초과하는 거액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 제39권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타운센드상회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는 드러나 있지 않으나 타운센드는 영세한 조선 상인들에게 고리대금업을 했던 것이다.
세창양행이나 타운센드상회가 이럴 정도에 이른 것은 앞서 말한 독일인 묄렌도르프나 미국공사 알렌 같은 유력 인사들이 자기들 국가 상인들을 비호했기 때문이었다. 제 나라 땅을 별천지로 내주고, 거기에 더해 상인으로 온 자들에게 정부도 소상인도 빚쟁이로 몰려 피를 빨렸으니 어찌 빗나간 개항이 아니라 하랴.
물론 성공회에서 설립한 '낙선시(樂善施)' 병원의 의사 랜디스((Eli Barr Landis) 박사나 인천해관의 마지막 수장이었고, 타운센드상회 역시 마지막 운영자였던 맥코넬(William Mcornell) 같은, 한국인에 대해 애정과 우호를 가졌던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오직 부의 축적만이 목적이었고, 그 중 일부는 일본여성을 처(妻)로 두었던 까닭에 친일적이어서 제물포의 서민에게는 무관심하거나 냉담했다.
각국조계는 우리 역사에 몇 가지 기록을 남기기는 한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으로 기록되고, 전쟁 통에 회진(灰塵)된 세창양행 숙사는 최초의 양관(洋館)으로 기록된다.
그밖에 각국조계 내에 오만하게 서서 인천항을 내려다보던 뫼르젤 저택, 헨켈 저택, 세관장 저택, 모오스 저택, 데쉴러 저택, 맥코넬 저택, 오례당 저택, 제임스 존스턴별장, 파울 바우만 저택, 쉬르바움 저택 등 별천지의 거각(巨閣)들은 전쟁으로, 후일의 철거로 모두 사라졌다. 지금은 각국조계 거주자들의 사교 클럽으로 쓰였던 제물포구락부만이 남아 백여 년 전의 역사를 몸으로 말하고 있다.
/김윤식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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