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신매매·아편…이런 사람들에 우리땅 내줬다니

처음엔 대국 '청상' 높여 불렀으나
돼지꼬리 변발·뒤뚱뒤뚱 전족 발
칙칙한 의상에 품값 아끼며 생활
노무자·행상인도 늘자 '청인' 하대

장사의 귀재로 일본 앞서 상권 장악
거상들 큰 점포·시설 줄이은 청관

노무자들 중국서 무차별 들어와
조선인 일자리 잠식 사회문제로

마약 밀수·부녀 유괴 범죄 다반사
인천의 세단체 애련회 기구 만들어
팔려가는 조선 여인 30여명 구출도
▲ 우중충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띄었지만 청국조계는 저들 나름대로 활기를 띄고 있었다, 무역상, 잡화상, 채소상, 만두와 호떡장수 등 부지런하고 참을성이 <br>​​​​​​​많은 상인들과 더불어 노무자들도 싼 품값으로 우리나라 전국에 퍼졌다. 사진 속에서 청국인 특유의 장대를 어깨에 얹어 물건을 지는 풍경도 볼 수 있다. <br>/사진출처 =인천 정명 600년 기념『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우중충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띄었지만 청국조계는 저들 나름대로 활기를 띄고 있었다, 무역상, 잡화상, 채소상, 만두와 호떡장수 등 부지런하고 참을성이
많은 상인들과 더불어 노무자들도 싼 품값으로 우리나라 전국에 퍼졌다. 사진 속에서 청국인 특유의 장대를 어깨에 얹어 물건을 지는 풍경도 볼 수 있다.
/사진출처 =인천 정명 600년 기념『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옛 청국조계지 풍경으로 현재의 차이나타운 거리이다. 이곳에는 1885년 주한 총리 원세개(袁世凱)를 따라 들어온 동순태(同順泰), 인합동(仁合東), 동화창(東和昌) 등 청나라 거상(巨商)들의 큰 점포가 줄지어 서 있었고 그 뒤로는 여관, 잡화상, 음식점, 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이곳을 청관(淸館)이라고 불렀다./사진출처=인천 정명 600년 기념『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1
▲ 옛 청국조계지 풍경으로 현재의 차이나타운 거리이다. 이곳에는 1885년 주한 총리 원세개(袁世凱)를 따라 들어온 동순태(同順泰), 인합동(仁合東), 동화창(東和昌) 등 청나라 거상(巨商)들의 큰 점포가 줄지어 서 있었고 그 뒤로는 여관, 잡화상, 음식점, 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이곳을 청관(淸館)이라고 불렀다./사진출처=인천 정명 600년 기념『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1

일본이 조계를 설정하자 뒤질세라 선린동 해안가 5천여 평에 조계를 설정한 청국은, 과거의 행세가 조선의 종주국이었다는데, 제물포 주민들이 이웃하고 보니 행색은커녕 사는 모습조차 도무지 나을 것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처음에 청관의 청상을 대국 사람이라고 높여 불렀으나 노무자와 행상인이 늘면서 그들을 청인이라고 하대했다. 남자들은 돼지꼬리처럼 땋아 내린 변발(_髮)을 했고, 부녀자는 걸을 때면 뒤뚱거리는 조여붙인 전족(纏足)을 하고 남녀 간에 칙칙하고 더러운 검정색 아니면 청색 무명옷을 입고 있었으니 깔볼 만한 몰골이기도 했다. 게다가 싼 품값을 아껴가며 지내는 빈곤하고 불결한 살림과 툭하면 아편(阿片) 밀매다 부녀자 유괴다 하는 범행을 저지르는 음흉한 성격 등 그들의 생활 실태를 직접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풍조는 청일전쟁 후 일인의 뒤를 이어 더욱 심해 갔다.

신태범 박사의 『개항 후의 인천 풍경』의 내용인데, 더 이상 부연할 말이 필요치 않다. 훈도시 바람의 하층 불량배 따위의 일인, 불결하고 음흉한 이런 청인들에게 제 땅을 내주고 밀려나야 했으니…. 경우는 좀 다를지 모르나 이 같은 중국인의 모습은 현대의 소설 속에도 등장한다.

뒤통수에 쇠똥처럼 바짝 말아 붙인 머리를 조금씩 흔들며 엄청나게 두꺼운 귓불에 은고리를 달고 전족한 발을 뒤뚱거리며 여자들은 여러 갈래로 난 길을 통해 마치 땅거미처럼 스르스름 중국인 거리를 향했다.

남자들은 가게 앞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말없이 오랫동안 대통담배를 피우다간 올 때처럼 사라졌다. 그들은 대개 늙은이들이었다. <중략>

아편을 피우고 있는 거야. 더러운 아편장이들.

소설가 오정희(吳貞姬, 1947∼ )의 단편 『중국인 거리』의 일부분이다. 두 글이 그린 중국인 모습은 시간적으로 최소한 6∼70년의 상거(相距)가 있는데, 개항 이후의 청국인의 모습과 1957∼8년 무렵의 청관의 중국인의 모습이 비슷하다. 단지 신 박사의 글에는 보이는 중국 남자들의 변발만이 사라졌을 뿐.

▲ 청국영사관 외관. 1884년 4월에 자기들 명칭대로 인천청국이사부(仁川淸國理事府)로 개설하였다. 현재 화교 소학교가 위치한 곳으로 청관 지역 중앙에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애련회(愛憐會)에서는 1924년 9월 28일 영사관을 방문, 조선 부녀자 유인 매매는 국제적인 문제로서 영사관이 나서서 단속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사진출처=인천 정명 600년 기념『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1
▲ 청국영사관 외관. 1884년 4월에 자기들 명칭대로 인천청국이사부(仁川淸國理事府)로 개설하였다. 현재 화교 소학교가 위치한 곳으로 청관 지역 중앙에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애련회(愛憐會)에서는 1924년 9월 28일 영사관을 방문, 조선 부녀자 유인 매매는 국제적인 문제로서 영사관이 나서서 단속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사진출처=인천 정명 600년 기념『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1
▲ 한중(韓中)간을 운항하는 중국 기선 이통환(利通丸)은 속아 팔려가는 조선 부녀자를 실어 나르는 배로 악명이 높았다. 인천수상(仁川水上) 파출소에서 이통환의 출발에 앞서 임검(臨檢)을 행한 결과 3등실 모퉁이에서 남편의 노름빚 35원에 팔려가는 조선인 김 모 여인을 발견, 구조하였다는 1925년 2월 23일자 매일신보 기사 제목이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한중(韓中)간을 운항하는 중국 기선 이통환(利通丸)은 속아 팔려가는 조선 부녀자를 실어 나르는 배로 악명이 높았다. 인천수상(仁川水上) 파출소에서 이통환의 출발에 앞서 임검(臨檢)을 행한 결과 3등실 모퉁이에서 남편의 노름빚 35원에 팔려가는 조선인 김 모 여인을 발견, 구조하였다는 1925년 2월 23일자 매일신보 기사 제목이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부녀자 인신매매 외에도 이통환은 청인 노동자를 조선에 마구 실어 나른 배로도 유명했다. 역시 1931년 3월 10일자 매일신보 기사로 이틀 전인 8일에 이통환으로 '쿠리' 1430여명이 인천항에 몰려 들어온 사실을 보도하며 제목을 “중국 노동자 사태”라고 썼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부녀자 인신매매 외에도 이통환은 청인 노동자를 조선에 마구 실어 나른 배로도 유명했다. 역시 1931년 3월 10일자 매일신보 기사로 이틀 전인 8일에
이통환으로 '쿠리' 1430여명이 인천항에 몰려 들어온 사실을 보도하며 제목을 “중국 노동자 사태”라고 썼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청관에 대한 인상은 이렇게 잿빛 그림처럼 우중중하고 음산한 것이지만, 청인들은 끈기가 있는 데다가, 장사의 귀재답게 러일전쟁 전까지는 일본에 앞서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초기 청관에는 대표적인 무역상 동순태(同順泰)를 비롯해 인합동(仁合東), 동화창(同和昌), 지흥동(誌興東), 동순동(同順東) 같은 거상들이 자리를 잡고 본국과 교역을 시작했다. 이들의 수입품은 제물포 주민들로서는 처음 보는 개화 상품들로 주로 광목, 옥양목 등 직물류(織物流)와 설탕, 콩기름, 양잿물 따위의 일용품이었다.

일부 청인들은 신흥동, 만석동 등지에서 채소를 재배하여 터진개에 푸성귀전을 열었고, 만두와 호떡을 파는 상인들도 생겼으며, 맨몸으로 황해를 건너온 값싼 노동자들은 자국 조계를 기반으로 해서 인천의 건축, 토목 일자리에 투입되었다.

실제 1920년대에 이르면 거의 무차별로 쏟아져 들어오는 청국인 노무자들로 해서 우려의 목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1925년 4월 10일자 매일신보에 그런 기사가 실린다. 내용인즉, 전년 1924년에 2만9천여 명에 달하는 청인 쿠리가 조선 노동자들의 밥을 빼앗았는데, 금년 1925년 4월말까지, 벌써 작년의 3분의 2 수준인 2만여 명이 도항해 오리라면서 “생활비 적고 품삯 싸고 인내력 많은” 청인 노동자들을 막을 무슨 대책이 있는가, 걱정하는 내용이다.

1927년 2월 7일자 중외일보도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싸구려 쿠리들이 조선 노동자들의 일터를 모조리 잠식하고 있는 데에 대한 반감과 함께 총독부 사회과(社會課)에 그 대책을 서둘라고 촉구하는 기사를 쓰고 있다.

청인 노동자들의 과도한 입국도 골칫거리였지만, 범죄 또한 큰 문제였다. 신 박사의 기록대로 그들은 툭하면 마약 밀수와 부녀 유괴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부녀 범죄에 대해서는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의 기록이 생생하다.

우리들 기자단은 화평동 산꼭대기 중국인 채전에 있던 토막을 습격했다. 거기에도 젊은 여자가 몇이 있었다. 경찰과 함께 축항에서 발묘(拔錨)하려는 '이통환'(利通丸)' '제2 이통환(第二利通丸)을 수색했다. 배 밑창에서 조선 여자 10여 명이 발견되었다. 우리들은 '만취동(萬聚東)'의 객잔(客棧)까지 수색했고, 청관 지하실 어두컴컴한 곳에서도 무장 경찰을 대동하고 수색한 결과 인천항으로부터 청도(靑島)와 지부(芝_)로 팔려가는 조선 처녀 30여 명을 구출했다.

참으로 음험하고 흉측한 이 내용은 고일 선생이 당시 신문기자로 있으면서 실제 겪었던 사실이다. 취직이나 결혼을 미끼로 꼬여 거기에 빠져든 빈곤한 조선 처녀들이 중국에 팔려 넘겨지기 직전에 극적으로 구출해 낸 경험담이다.

인신매매 여성들의 구조는 배가 떠나는 인천항 외에서는 불가능한 까닭에 제물포청년회(濟物浦靑年會), 한용청년회(漢勇靑年會), 인천노동총동맹회(仁川勞動總同盟會) 등 인천의 세 단체가 나서서 애련회(愛憐會)라는 기구를 만든다. 이 회는 청국영사관에 대해 근절 대책 주문, 배 수색 등 적극적인 구조 활동을 폈다. 고일 선생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애련회 기사는 1924년 9월 24일자 시대일보에 실려 있다.

그밖에 마약 밀매, 폭행, 절도 같은 범죄도 상당히 많아 사회적으로 마찰과 갈등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31년 일본의 농간으로 만보산(萬寶山)사건이 터졌을 때 외에는, 함께 일본 밑에 눌려 있다는 동병상련의 마음이었는지 인천에서 두 나라 사람들은 크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1914년 부제(府制) 실시 당시 일본은 청관을 지나정(支那町), 미생정(彌生町)으로 얕잡아 명명했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상당수 청인들이 귀환했으나, 1945년 일본 패망 때까지 멸시와 핍박 속에서도 인천의 청인들은 지독하리만치 끈질기게 후미진 청관 구석, 사라진 자국 조계지 자리에 남아 있었다.

/김윤식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