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육 (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장, '영흥도순례'행사에서 밝혀
강화 양민 희생 유족 동행…진실규명·추모사업 펼치기로
▲ 최태육 (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장이 17일 진행된 ‘제2회 평화순례’에서 6.25 한국전쟁 전후 인천과 주변 섬 지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태육 (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장은 “6.25 한국전쟁을 전후해 인천지역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간인 피해자가 1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활동한 최 소장은 지난 17일 미군의 섬 점령 작전과 민간인 학살 현장을 돌아보는 ‘영흥도 순례’ 행사에서 이같이 밝혔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고,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화해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이 행사에 동행한 강화 양민학살 희생자 유족회원들과 인천지역 시민단체는 ‘인천·강화유족회’를 만들어 진실규명과 추모사업 등 펼쳐 나가기로 했다.

 

- 제2차 평화순례단, 인천 옹진군 영흥도 미 해군첩보대 터 방문

생명평화포럼(상임대표 정세일)은 이날 ‘2020 인천시 평화도시 공모사업’으로 진행된 ‘평화 순례’ 두 번째 행사로, 6.25 전쟁 당시 미 해군첩보부대가 주둔했던 인천 옹진군 영흥도를 찾았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전초전이 벌어진 이곳에서는 첩보 수집과 안전지대 확보 과정에서, 이 지역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이 무고하게 집단 학살됐다.

순례단은 먼저 미 해군첩보부대가 자리 잡았던 십리포 해수욕장 앞 소사나무 군락지에 도착해 당시의 참상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소사나무 군락지에는 미군 첩보부대가 자리 잡았고, 400-500m 뒤편에는 해군 첩보대가 주둔해 상륙작전을 위한 첩보 수집과 안전지대 확보 역할을 나눠 맡았다.

▲ 인천상륙작전 첩보전을 위해 영흥도에 진입한 미군 첩보부대는 십리포 해수욕장 앞에 주둔했다. 이곳에는 현재 천연기념물인 소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6월 14일 발표한 조사보고서 ‘서울·인천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을 통해 이 사건의 일단을 공개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5년 5월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에 의해 출범, 인권유린과 학살, 의문사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인 뒤 종합보고서를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했으며, 오는 12월 제2기 위원회 활동을 시작한다.

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해군 육전대와 해군 첩보대는 1950년 8월 18일부터 9월 말경까지 덕적도와 영흥도에서 위험 요소 제거와 작전의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최소 41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최 소장은 이에 대해 “영흥도와 덕적도 사이의 바닷길은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함선의 통로였고, 영흥도는 작전의 주요 거점인 팔미도와 영종도를 직접 눈으로 관측할 수 있는 요충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상륙작전의 후방인 영흥도를 안전지대로 만들기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민간인들을 무차별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 6.25 전후 인천경찰서 등에서 수백 명씩 집단 살해당해

순례단은 이어 영흥면 내리 언덕에 세워진 ‘영흥도 해군전적비’를 방문했다. 전적비 앞에는 영흥도 지구 전투 전사자와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명단이 새겨진 추모비가 자리 잡고 있다. 최 소장은 2016년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거론하며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일부는 영흥 주민 학살사건에 깊숙이 관여했는데도, 관련자의 미화를 넘어서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 평화순례단이 영흥도 내리 산자락에 세워진 해군전적비 앞에서 당시의 민간인 학살 참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순례단을 내리 영흥화력발전소 앞으로 안내한 최 소장은 인천 시내에서 발생한 6.25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인천주민들이 집단으로 살해당한 초기 사건은 1950년 6월 29일 인천시청 앞 발포사건이었다. 당시 인천의 대표적 우익인사까지 포함된 대책위원회 구성을 위해 시민들이 시청 앞으로 모이자 경기도 경찰국은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한다’고 판단하고 시청 정문을 나서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해 40-50명을 사살했다.

영국의 ’데일리워커‘지 특파원 알란 위닝턴은 1950년 9월호 기사를 통해 “인천에서 6월 29일부터 7월 3일 사이에 학살당한 인천 국민보도연맹원은 1800명이었다”고 보도했다. 최 소장은 “인천지역 민간인 학살사건은 1·4 후퇴를 전후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며 “인천경찰서 7백여 명, 동인천경찰서 5백여 명, 학익형무소 7백여 명 등 부역 혐의로 체포된 수많은 시민들이 적법 절차없이 살해됐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강화 교동이나 김포 등지에서 연행된 부역혐의자 200여 명이 배를 타고 마산형무소로 갔으나 배에서 내린 사람은 15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바다에 수장됐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참고인 진술을 수록하고 있다. 최 소장은 “여기에 미군의 포격과 인천지역을 가가호호 수색, 체포해 학살한 사례를 모두 포함하면 그 수는 1만 명 가까이 된다”고 덧붙였다.

 

- 강화지역, 집단 학살 피해에 비해 초라한 추모시설

이날 평화 순례에는 6.25 전쟁 당시 강화에서 발생한 양민학살 희생자 유족회원 3명이 동행해, 강화 본섬과 교동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소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국전쟁 기간 중 1·4 후퇴를 전후해 강화군 12개 면에서 430여 명의 민간인이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해 연행돼 무차별 살상당했다.

강화 교동 학살사건 조사보고서는 “강화군 교동면 주민 183명이 교동도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강화해병특공대에 의해 ‘내응행위자’라는 확인되지 않은 이유로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 학살당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학살사건 이후에도 수십 년간 ‘빨갱이 가족’으로 몰렸던 유족 상당수가 피해 신고를 하지 않아, 실제 피해 규모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최 소장은 “강화 본섬에서만 2천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는 당시 경찰 관계자의 진술이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이런 민간인 피해를 추모하는 강화도 내 시설은 2011년 강화군이 4천만 원을 들여 건립한 150평 규모의 위령지와 학살지 표지판 3개가 전부다. 이는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피해를 본 충북 영동 노근리나 경남 거창, 함양·산청에 2백억 원가량이 투입된 대규모 추모 시설이 건립돼 운영 중인 현실과 크게 대조를 이룬다.

▲ 6.25 전쟁 당시 ‘미군의 섬 점령 작전과 민간인 학살 현장’을 돌아보기 위해 영흥도를 찾은 ‘평화 순례단’이 십리포 해수욕장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평화순례 행사를 진행한 이희환 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대표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에 맞춰, 인천·강화 지역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들과 인천지역 시민단체들이 함께 힘을 모아 아직 확인되지 않은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운동을 벌여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찬흥 논설위원 겸 평화연구원 준비위원 report6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