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우리 땅을 되찾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아무리 나라 간 이해득실을 따져 셈을 부린다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외세에 좌지우지되는 '사실'을 지켜보는 마음이 착잡하다. 우리 땅인데도 남의 나라가 점거·관리해온 부평 미군부대 캠프마켓(Camp Market)을 일컫는 말이다. 일제 강점기 무기공장이었다가 해방 후 미군기지로 쓰였던 캠프마켓이 마침내 80여년 만에 시민에 공개된다. 오랫동안 민간인 출입을 통제해 '금단의 땅'으로 불렸다가, 이제서야 시민들과 만날 준비를 한다. 세월의 더께가 무심하기만 하다.

거슬러 올라가 보자. 캠프마켓 전신은 일제 때 군수공장이었던 육군조병창이었다. 일제는 1939년 부평에 군수 물자를 보급하던 조병창을 건설했다. 일제는 조병창을 짓고 많은 조선인을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당시 여기서 일을 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합숙소가 좁은 골목에 아직도 흔적을 남긴다. 우리에겐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해방 직후엔 애스컴(ASCOM·Army Service Command)으로 알려진 미 군수지원사령부가 '점령'했다. 애스컴은 한국 내 미군부대에 대한 무기와 식량 보급을 맡았다. 애스컴엔 한국 파병 미군이 자대 배치를 받기 전까지 대기를 했다.

한국전쟁 이후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애스컴 시티' 주변으로 미군 물품이 유통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미군들을 위한 각종 상점과 오락장 등이 들어섰다. 미군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는 '기지촌'도 생겨났다. 과거 미군 클럽 10여개가 성황을 이루면서 내국인들을 끌어들였다. 애스컴 시티는 1950~60년대 대중문화 중심지로서도 아주 유명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들이 부평에 터를 잡아,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한다.

이렇게 번성했던 애스컴은 1973년 해체되고 '빵 공장'인 캠프마켓만 남았다. 1980년대부터는 사실상 군사 기능을 상실한 캠프마켓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됐다. 그러면서 캠프마켓을 시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미군부대 이전의 불을 당긴 이는 현 최용규 인천대 이사장. 초대 부평구청장 시절이던 1995년 8월 구를 방문한 故 최기선 인천시장에게 미군부대 이전운동을 제안했다. 이후 시민·사회단체들이 본격적으로 미군기지를 되찾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부대 앞 농성, 인간띠 잇기, 걷기대회 등의 행사를 진행했다. 결국 지난해 말 한미 간 합의로 캠프마켓 1단계 구역(21만㎡)이 인천시에 반환됐다.

캠프마켓 북측 부지엔 토양에서 다이옥신을 비롯한 인체 유해 물질이 검출돼 환경정화 작업을 벌이는 중이다. 인천시는 시민의 날(10월15일)에 맞춰 14일부터 남측 부지 개방을 알리는 온·오프라인 행사를 열기로 했다. 캠프마켓의 구체적 활용 방안은 시민 의견 수렴을 거쳐 내년 말쯤 확정된다. 아직 공론화 과정이 남았다는 얘기다. 우리 땅인데도 외세가 관리해온 땅이 하루빨리 시민 품으로 완전히 돌아오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