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의 어제와 오늘이 애잔하다. 개항(1883년) 이후 일본인에 밀려 정착한 조선인, 대형 공장에 일자리를 찾아 각지에서 온 노동자,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온 피란민…. 개항기 일제가 주류를 이뤘던 중구 일대와는 달리, 서민들의 생활이 녹아 있어 애틋하다. 이들이 간직한 삶의 편린을 보여준다. 어쩌면 옛 동구민들의 삶이야 말로 인천을 알려주는 모습일지 모른다.

현 중구청에서 신포동을 거쳐 자유공원 쪽으로 올라가면, 홍예문((虹霓門)을 만난다.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게 지은 아치형 돌문이다. 홍예문(송학동2가·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9호)은 중구와 동구를 잇는다. 개항 당시 인천항 인접 중앙동과 관동 등지에 살던 일본인들이 전동과 만석동으로 거류지를 넓히려고 뚫었다. 그 무렵 일본 조계지나 항구에서 만석동에 가려면, 내동과 용동마루턱을 지나 화평동으로 돌아가야 했다. 통행에 불편을 겪자, 응봉산 남쪽 마루턱을 깎아 홍예문을 만들었다. 폭 4.5m, 높이 13m, 통과 길이 13m. 일본 공병대가 1905년에 착공해 1908년에 완공했다고 전해진다. 홍예문은 아직 도로로 사용 중이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만석동을 비롯해 화수·송현동 등지는 동구의 주요 지역으로 꼽힌다. 대개 일제 때 매립을 통해 형성된 이들 마을은 항구로서 역할뿐만 아니라 인천의 산업화를 이끌었다. 1906년 인천에서 처음 상수도를 개통한 곳(수도국산)이 송림동이란 점을 떠올리면, 동구의 위상을 알게 한다. 일제에 의해 조성된 '산업지대'는 해방을 전후해 산업화 첨병 노릇을 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대규모 공장(일본제분·조선목재·동양방적·조선기계제작소 등)이 동구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 해방 후엔 한국유리공업·동일방직·두산인프라코어·동국제강·현대제철 등 굴지의 기업이 들어섰다. 당연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국전쟁 때는 황해도 피란민들의 안식처였다. 이래 저래 서민들이 살아가는 데 이만한 곳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인천항 개항 초기 300여명에 불과했던 일본인은 1934년 1만2000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그 해 인천 인구는 6만여명. 일본인이 인천 인구의 20%를 차지한 셈이다. 당시 기록으론 잘 알 수 없지만, 조선인 중 현 동구에 살았던 주민도 상당수에 이른다는 분석이다. 대형 공장을 다니는 이들이 주변에 많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랬던 동구가 지속적인 인구 감소로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1992년 11만4937명에 달하던 인구수는 1996년 10만명 아래로 내려갔다가 지난해엔 6만4427명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속도대로라면 몇년 안에 5만명대 이하로 떨어질 전망이다. 주민들이 동구를 떠나는 속내엔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주위에 '신도시'가 잇따라 들어서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좀더 편한 쪽으로 움직이는 게 인간의 속성이라고 할 때, 어쩔 수 없겠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동구 곳곳에서 상생할 수 있는 '주거환경' 조성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