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주·상인·미두꾼 모여 들며
조선에 없던 유흥시설 들어와
일본식 요릿집서 주식·예기 영업
1902년 공창제도 유곽 허가도
등록 기생들 관리기구 권번 탄생
막대한 수입 … 화류계에 돈 지출
이화자·복혜숙·유신방·장일타홍
당대 유명 가수·배우 배출도
개항이 가져온 또 하나의 비뚤어진 '선물'이 이른바 도시에 퍼진 '음풍치성(淫風熾盛),' 곧 유흥과 향락의 풍미(風靡)였다. 돈이 돌면 술이 넘쳐나고, 술이 넘치면 여자의 웃음소리가 따르게 마련이던가.
권번(券番)의 탄생이 바로 그런 음풍의 한 전형이었다. 초기 개항장 제물포에는 노동계층을 상대로 하는 목로주점이나 방술집이 고작이었다. 조금 발전한 곳이라야 술시중을 드는 여자가 있는 정도였다.
이후 미곡 수출이 증가하고 화물 유통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제물포항에는 부요한 객주, 상인들이 생겨났다. 거기에다 각지로부터 미두꾼들까지 모여 들면서 이들의 돈이 요릿집 탄생을 부추기고, 권번 같은 시설까지 등장케 했다.
물론 이런 유흥시설을 만든 것은 전적으로 일본인이었다. 그들의 성정(性情)과 습벽이 워낙 그러해서, 그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으레 유흥업소부터 생긴다는 말 그대로, 우리에게는 없던 시설인 권번과 유곽을 제물포에 들여 놓은 것이다.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서 그에 대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일본인의 활동은 모든 면에서 인천이 서울보다 앞서 있던 때라 유흥시설도 인천에 먼저 상륙했다. 청일전쟁 후에 일본지계 안에 일산루(一山樓, 관동), 조일루(朝日樓, 관동) 팔판루(八阪樓, 신생동) 등 본격적인 일본 요릿집이 영업을 시작했다. 점차로 질서가 잡히자 본국의 제도를 도입하여 주식(酒食)과 예기(藝妓)는 요릿집에서 맡고 창녀는 공창제도(公娼制度)인 유곽(遊廓)에서 종사하게 했다. 이때 예기를 관리하는 권번이 설치되고 1902년에 유곽의 허가도 내렸다고 한다.
권번이란, 오늘날로 치면 연예인들과 공생하는 매니저 격이라 할 수 있다. 등록된 기생들을 요릿집에서 요청하는 인원수대로 시간을 받아 전용 인력거에 태워 보내고 그날그날 화대(花代)를 수금하는 식으로 기생들을 관리하는 기구였다. 그러면서 권번에서는 동기(童妓)들을 교육해 양성하기도 했다. 서울, 평양, 진남포, 개성, 안성, 수원, 대구, 김천, 동래, 창원, 광주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 순차로 설치되었다.
인천 권번의 역사는 2015년에 인하대 이영태(李榮泰) 교수가 발간한 『권번』에 정리되어 있다. 그 출발은 1906년 조선인 기생들로 이루어진 용동기가(龍洞妓家)였는데, 1912년 용동기생조합소(龍洞妓生組合所), 1925년 용동권번(龍洞券番), 1937년 인화권번(仁和券番)으로 변천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일본 기생들은 1938년에 인천권번(仁川券番)에 적을 두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밖에 다른 이름, 곧 1930년대 초반 몇몇 신문에 보이는 소성권번(邵城券番), 인천예기권번(仁川藝妓券番), 인항권번(仁港券番) 같은 명칭도 있었다. 그러나 인천에는 오직 한 권번만 있었으며, 따라서 모두 동일한 권번을 지칭하는 것인데, 무슨 이유인지 기사화될 때마다 제각각 달리 표기되곤 했다.
아무튼 권번의 운영은 경제 상황에 따라 분명 부침(浮沈)이 있었을 터이나 대체로 무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3년 1월 13일자 중앙일보는 「불경기 모르는 인천 화류항(花柳港)」이라는 제하에 “홍등녹주(紅燈綠酒)에 던지는 돈,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라며 오히려 인천항의 유흥, 향락 풍조를 못마땅한 어조로 썼을 정도다.
인천소성예기권번(仁川邵城藝妓券番)의 작년도 화대(花代)를 조사한바 대 예기 총합 69명의 1년간 불린 총 시간수(總時間數)가 36,290시간이오 그 시간대(時間代)가 45,359원 90전이라는 막대한 금액에 달하얏는데 이것을 다시 부내 일본인 조선인의 예창기(藝娼妓)를 합하야 본다면 매년 평균 20여 만 원에 달할 것이라 하니 이것으로써 보면 부내 7만 부민이 화류계에 던지는 돈도 상당한 거액에 달하는 것을 능히 알 수 잇다 한다.
이 기사대로 1932년 1년 동안, 권번 기생들이 요릿집으로 불려나간 총 누적시간 36,250시간의 화대인 45,359.9원을 환산하면 상등품 쌀 3천 가마가 넘는 액수다. 그 때문에 중앙일보뿐만이 아니라, 1931년 2월, 매일신보 역시도 “조선서 제일 잘 버는 사람이 누구냐, 먼저 손을 들고 나설 사람은 기생들뿐”이라며 그들의 수입이 많음을 꼬집고 있다.
권번은 이렇게 인천을 녹주(綠酒)에 취하게 하고, 홍등(紅燈) 향락에 돈을 던지게 한 진원(震源)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으나, 때때로 사회봉사를 위해 나서기도 했고, 가수나 배우 같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연예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어머님전상서」로 일약 정상 가수가 되었다가 마약 중독으로 요절한 이화자(李花子), 1912년 여름에 보급차 긴급 입항한 중국 군함의 청년 함장을 반달 동안이나 치마폭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 박미향(朴美香), 일본 기생보다 일본 소리를 잘한다 해서 일본인의 인기를 끈 이화중선(李花中仙), 가정 사정 때문에 잠깐 용동에 적을 두어 춘원(春園), 고하(古下), 설산(雪山) 등 명사가 인천에 찾아와 학생 기생으로 유명하던 복혜숙(卜惠淑), 모두가 흘러간 용동의 빛나는 별들이었다.
신 박사의 이 같은 기록 외에도, 용동권번 출신으로 이화자와 쌍벽을 이루던 민요곡 가수 장일타홍(張一朶紅)과 영화감독 나운규(羅雲奎)에 의해 발탁되어 「벙어리 삼룡」 등 3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유신방(柳新芳) 같은 배우도 있었다. 유신방은 나운규와의 염문으로 혹독한 구설을 듣던 나머지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일제가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 유흥 시설들은 움츠러들었고, 광복 이후 문을 닫았다. 신태범 박사는 윗글 말미에 “이름 높던 미인과 미희가 모조리 늙고 시들고 그리고 죽었구나.” 이렇게 고일 선생이 적은 '인천 화류항의 무상함'을 인용하고 있다.
빗나간 개항을 몸으로 회오(悔悟)하려는지, 용동권번 계단석은 골목 비탈길 중턱에 가로누워 오늘도 뭇 사람들의 발길을 받아내고 있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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