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이룬 꿈 '조국 독립'안고 연평도서 장엄한 최후


이진룡 의진 부장 출신 … 평산~해주 왕래
정병 500여명 이끌고 30여 전투 무패 기록
심노술·지홍윤 등과 섬 지역서 맹활약

일본군 추격에 연평도 부근 상륙했지만
미리 매복한 일본군과 5시간 넘는 교전

이근수 의병장 비롯 46명 전사 순국
대통령 표창·건국훈장 애국장 공적 기려
▲ 이근수 의진이 상륙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연평도 가래칠기 해안. /사진제공=인천광역시 옹진군청 홈페이지

 

◆ 이진룡 의진에서 시작한 의병투쟁

황현은 <매천야록> 제6권에서 이근수 의병장은 '이진룡 의진의 부장(部將) 출신으로 정미년(1907)에 의병을 일으켜서 평산과 해주 사이를 왕래하며 정병 5백여 명이 있었고, 일병과 30여 회 싸워 일찍이 패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특히 정예 병사(의병) 500여 명을 이끌었다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이근수 의병장이 부장으로 활약한 이진룡 의진의 출발은 평산의진에서 나온 것이었다. 1907년 8월, 광무황제가 퇴위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거의하라'는 광무황제의 밀지가 청주·목천 군수를 역임한 정3품 박정빈(朴正斌)에게 전달되었다. 이에 평산과 해주 등지의 전직 관료와 유생들이 모여 기병을 논의하여 박정빈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격문을 돌리자, 4000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어 대규모 의진을 구성했는데, 일반적으로 평산의진이라고 하지만 황해도 중남부 지역의 의병으로 구성된 의진이었다. 박정빈을 비롯하여 전 해주·순천 군수 정3품 정인국(鄭寅國), 전 영월·김화 군수 정3품 이창하(李昌夏), 전 육군 참위 정3품 김창호(金昌浩), 전 내부기수 정3품 신창균(申昌均), 전 중추원의관 이진룡 등 일제침략기 전·후기 의병사에 전무후무할 정도의 전직 고관들이 대거 참여한 평산의진에서 이진룡 의병장은 유격장·선봉장·대대장을 맡았고, 이근수 의병장은 주요 직책을 맡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박정빈 의병장과 호응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것도 드러나고 있다.

평산의진의 총대장 박정빈 의병장은 그해 11월부터 이듬해 1월 말까지 전개되었던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여 신돌석(申乭石) 의병장 뒤를 이어 교남(영남) 창의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7월 유인석 의병장과 함께 연해주로 향하게 되자 평산의진은 이진룡 의병장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이근수 의병장은 이진룡 의진의 부장(部將)으로 활약하게 되었고, 나아가 독립의진을 이끌면서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이근수 의진 60명과 박목천(박정빈) 의진 80명의 활약상이 담긴 보고서. (<폭도에 관한 편책>. 1908. 12. 16)
▲ 이근수 의진 60명과 박목천(박정빈) 의진 80명의 활약상이 담긴 보고서. (<폭도에 관한 편책>. 1908. 12. 16)
▲ 일본군경 변장대와 밀정을 동원하여 이근수·지홍일(지홍윤) 의진을 추적하는 보고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159쪽)
▲ 일본군경 변장대와 밀정을 동원하여 이근수·지홍일(지홍윤) 의진을 추적하는 보고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159쪽)

 

◆ 황해도 해안과 섬 지역에서 활동

이근수 의병장의 활약상이 일제의 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08년 9월이었음이 일본인 황해도 경찰부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황경수(黃警收) 제66호'(1908. 09. 22)에 보인다.

 

▶ 황해도 해주군 화양면(花陽面) 6리

농업 이만경(李萬京) 31세

우자(右者)는 본년 7월 해주경찰서에서 귀순을 허가하고 면죄문빙(免罪文憑)을 교부한 자이었던 바, 본월 14일 오후 1시 30분 폭도수괴(暴徒首魁:의병장-필자 주) 이근수(李根守)가 인솔하는 부하 30명에게 납거되어 해주군 화양면 천중(川中)에 총살당하고 있었음을 발견한 것을 해주경찰서장으로부터 보고가 있었으므로 이에 회보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72~73쪽)

이근수 의병장이 의진 30여 명을 이끌고 귀순한 의병을 처단한 보고서다.

일제와 그들 앞잡이 내각은 의병해산을 위해 군수와 수비대장, 경찰서장 등으로 하여금 감언이설로 '귀순하면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을 선전하는 바람에 많은 의병들이 관청에서 마련한 자리에 나아가 융희황제께서 내렸다는 하사주(下賜酒) 한 잔을 마시고, 의병활동의 죄를 면제해주는 이른바 면죄문빙(免罪文憑)이라는 종이를 받고는 의병활동을 그만두거나 의병학살에 나선 일본군·헌병·경찰에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런 경우 의진에서는 의병들의 동요를 막고, 의병에 참여한 자들의 신분이 드러날 것을 염려하여 귀순한 의병을 처단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해 10월 이후 이근수 의병장은 이진룡 의진은 물론, 강춘삼(姜春三)·김용기(金龍基)·심노술(沈魯述)·연기우(延起羽)·지홍윤(池洪允)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과 서로 호응하여 의병투쟁을 펼쳐나갔다.

 

▶ 평산관구

전기에 비하여 적도(賊徒:의병-필자 주)의 출몰이 증가하고 점차 불온의 경향을 나타냈다. 엄밀 정찰 중, 적괴(賊魁:의병장-필자 주) 이진룡(李鎭龍)은 7, 80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평산군 멸악산(滅惡山)을 중심으로 야음을 타서 부근의 부락을 배회하고 있다.

연안지방은 작금(昨今) 한층 불온하여 수십 명의 적도가 누차 출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적괴 심노술(沈魯述)·이근수(李根守) 등의 부하 이외에 또 소수괴(小首魁:규모가 작은 의진을 이끄는 의병장-필자 주)가 인솔하는 적 다수가 침입하여 바다와 육지 공히 교묘히 우리 시선 외에서 행동하고 있다. 금천군 수룡산(水龍山:금천을 거한 동북방 약 50리 수룡산은 금천·개성·장단·연천·삭녕·토산에 과한 고산이다)에 적괴 연기호(延基浩:연기우延起羽-필자 주)가 인솔하는 약 1천명의 적이 침입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으나 믿기 어렵다.

▶ 마산관구

전기에 비하여 대차 없다. 그러나 해주 동쪽은 심노술(沈魯述)·강춘삼(姜春三)·이근수(李根守)의 무리가 출몰하여 인심이 불안한 상태에 있다. 해주 서쪽은 소수괴 조명서(趙命瑞)의 일파 10여 명이 배회하는 데 불과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339~341쪽)

일제의 기록에는 이근수·지홍윤 의진이 황해도 해안지방인 배천·연안·평산 지역과 강화도·교동도 등 섬 지역에서 맹활약을 벌여도 소수의 일본 군경으로 대적하기가 쉽지 않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들 의진의 보유한 100여 정의 '모젤' 총, 촌전식 총은 여느 의병들이 소지하고 있는 화승총에 비해 매우 정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 일본군·헌병·경찰 연합부대가 하루 전부터 매복했다가 연평도에 상륙한 이근수·지홍일(지홍윤) 의진을 공격, 이근수 의병장 등 46명 순국한 기록. (<폭도에 관한 편책>. 1909. 01. 20)
▲ 일본군·헌병·경찰 연합부대가 하루 전부터 매복했다가 연평도에 상륙한 이근수·지홍일(지홍윤) 의진을 공격, 이근수 의병장 등 46명 순국한 기록. (<폭도에 관한 편책>. 1909. 01. 20)
▲ 연평도에 매장되었던 이근수 의병장 등 30여 의병 사체를 발굴, 황해도 연안군 거래포 현암동으로 개장(改葬)한 보고서(『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770쪽)
▲ 연평도에 매장되었던 이근수 의병장 등 30여 의병 사체를 발굴, 황해도 연안군 거래포 현암동으로 개장(改葬)한 보고서(『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770쪽)

 

◆ 5시간 격전의 연평도전투

일본군은 이근수·지홍윤 의진을 진압하기 위해 황해도 해안지방의 수비대로 하여금 변장대와 밀정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정찰활동을 벌이면서 추적에 나섰다.

“12월28일, 장교 이하 12명에게 주재소 일·한 순사 4명을 함께 보내 밀정을 풀어놓고, 변장 후, 그 수괴라고 지목되는 지홍일(池洪一:지홍윤池洪允-필자 주)·이근수(李根守)의 소재 정찰을 위해 향하였던 바, 양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가 일단(一團)이 되어 부하 150여 명을 인솔하고, 며칠 전부터 평산·금천·배천을 횡행, 도처에서 금품을 강청하고, 식사를 하고 간 흔적이 있었으므로 각자 수배하여 그 행로를 추적한 결과, 배천군 화산면 목장동(木場洞)에서 재빨리 우리 정찰대가 옴을 깨닫고 삼삼오오 나누어 드디어 그 종적을 감추었으나 수괴들은 아직 부근에 잠복하고 있는 흔적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159쪽)

일본군은 의진을 이끄는 의병장이 심노술·이근수·지홍윤 등이라는 것을 파악한 후 황주·연안·해주수비대가 협공을 하고, 해주경찰서는 헌병과 순사를 파견하여 1909년 1월 16일 마침내 해주 용당포(龍塘浦)로부터 배를 타고 연안과 연평도 정찰을 하였다.

1월18일, 일본군의 추격에 이근수·지홍윤 두 의진은 연안에서 두 척에 배를 이용하여 이튿날 새벽 1시경 연평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하루 전에 도착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상륙하는 이근수 의진에 사격을 가하였다.

“16일 오후 12시 용당포(龍塘浦)를 출항하여 우선 연안을 우회하여 동 18일 이른 아침 연평도 부근에 이를 영격(迎擊)하도록 동도 이면으로부터 상륙하여 동남의 구상(丘上)에 보초를 펴고 전망하고 있었던 바, 다음날인 19일 오전 밤 1시경 동도 북방 연안에 괴이한 어선 2척이 내도(來到)함을 보고 주시하였던 바, 모두 카키색의 복장을 한 자 수십 명이 분승을 하고 총기를 휴대하고 있는 것까지 판명하기에 이르렀다. 일동은 서로 경계하고 적의 상륙을 기다려 돌격코자 잠복하고 있었던 바, 적도 충분한 주의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북방의 산악에 전망을 펴고 암벽의 사이에 산개하였다. 시기가 이미 익었다. 일행은 부대를 이분하여 협격하도록 준비하자 일제히 전진 돌격을 가하였던 바, 저들은 이미 동도 산악의 지형을 실지(悉知)한 것으로 교묘히 암애(岩崖)를 이용하여 완강한 저항을 하고 겸하여 그 총기의 예리함과 탄착점의 적확함에 그 세를 얕보기 어려워 산악절벽을 악전고투 약 5시간의 영섭(永涉) 드디어 수괴 이근수 이하 46명을 죽이고 거의 적을 전멸시킨 것은 실로 근래에 있어서의 장쾌한 거사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164~166쪽)

이 전투에서 지홍윤 의진은 한 척의 배로 탈출을 하였으나 이근수 의병장을 비롯하여 46명은 5시간의 격전 끝에 마침내 전사 순국하기에 이르렀고, 그 시신은 그곳에 매장되었다가 2월 8일 이근수 형 등 친척이 30여 구의 시신을 발굴, 육지로 운반하여 다시 장례를 치렀는데, 이근수 의병장은 연안군 거래포 현암동(玄岩洞)에 안장되었다.

“지난번 연평도에서 우리 토벌대에 의하여 전멸한 폭도수괴(暴徒首魁:의병장-필자 주) 이근수(李根守) 이하 30여 명의 사체는 연평도 사람들이 가매장하여 둔 바, 지난 달 8일 폭도(暴徒:의병-필자 주)들의 친족 등 4명이 연평도에 와서 이장에게 교섭 후 섬사람들로부터 사체 전부를 발굴하여 어선으로 맞은편 해안인 연안군 거래포(去來浦)에 묻었다고 하는 것을 해주경찰서에서 이를 듣고 취조한 바, 우 폭도 등은 모두 해주 동부의 연안·평산 지방의 사람들로서 수괴 이근수의 사체는 그 형이라고 칭하는 자가 거래포 현암동(玄岩洞) 부근에 개장(改葬)하였음을 위시하여 소대장 강병근(姜炳根)은 해주군 청운면 3리 이장 이화경(李華卿)의 처남으로 그 마을 이장이 인수 개장하고, 기타 친족·지기 등이 각각 개장 후 부근에서 장의를 치른 듯하다. 이에 보고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770쪽)

정부에서는 이근수 의병장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