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아더가 인천항 시설과 건물들을 시찰하는 모습. Arthur D. Struble 해군 중장과 Oliver P. Smith 준장이 동행했다. /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지난 14일 인천시청과 인천시교육청 앞에 한반도기가 내걸렸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발표한 9·19 평양선언,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금의 남북관계는 사실상 모든 교류가 단절된 상태다. 정부는 부랴부랴 이런저런 대책을 발표하고 대북라인도 교체했지만 경색국면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남북문제 전문가들은 남북 간 냉각 기류의 중심에 미국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미워킹그룹과 유엔사를 앞세워 사사건건 남북교류를 가로막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성토하고 있다.

▲승전의 역사로 기록된 인천상륙작전
70년 전인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미 극동군 사령관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 월미도에 상륙했다. 이 작전은 ‘불리했던 6.25 한국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 승전의 역사’로 기록됐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아준 ‘은혜로운 존재’이고, 맥아더는 우리 민족을 구해준 ‘영웅이자 구세주’로 칭송받는다. 인천 중구 응봉산 중턱에는 거대한 맥아더 동상이 세워졌고, 연수구에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자리 잡았다. 

▲소련의 팽창 저지를 위한 미국의 안보정책과 인천상륙작전
하지만 최태육 (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장 소장은 이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활동한 최 소장은 “광복 이후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철저히 ‘미국의 안보 이익’을 위해 진행됐다”고 주장한다.
특히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소련의 팽창정책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군사행동’에 불과했고, 우리 민족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한민족의 입장이 철저히 배제된 광복 이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NSC8)
인천생명평화포럼과 노동희망발전소, 도시공공성네트워크는 지난 10일 ‘인천상륙작전의 명과 암/공포의 기억과 승리의 기억’ 강연회를 공동으로 개최했다. 강연에 나선 최 소장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내용과 각종 미국 측 자료를 인용해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격에 대해 설명했다.
미국의 초기 대 한반도 정책은 1948년 4월 8일 미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고서 ‘NSC8’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보고서는 대한(對韓) 정책과 관련, “극동 지역의 전략 및 유엔과 관련된 △미국의 정치·경제적 입장 △미국의 국제적 의무 △미국의 안보 관심사 등 3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미국의 관심 사항에 국한된 내용으로 구성된 이 보고서 어디에서도 우리 민족의 입장을 반영한 대목이 발견되지 않는다.
 

▲ 최태육 (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장의 강연 <인천상륙작전의 명과 암/공포의 기억과 승리의 기억’>은 지난 10일 오후 유튜브로 생중계됐다.(사진은 강연을 진행하고 있는 최태육 소장)/유튜브 캡처

▲6.25 전쟁 직전 미군 철수를 주장한 맥아더
미국은 이를 기초로 다음 해인 1949년 6월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시켰다. 1950년 1월 12일에는 남한을 미국 방위선에서 제외한 ‘애치슨라인’을 발표했다. 이 발표 이후 5개월 뒤인 6월 25일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대해 최 소장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시킨 것은 맥아더 장군의 의견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그 근거로 1948년 12월 22일 미국 육군부 차관 드레이퍼가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 점령지역 차관보 살쯔만에게 보낸 전문을 제시했다.
이 전문은 “맥아더 장군은 최근 ‘한국의 소규모 부대는 이 취약한 돌출부가 적의 주공을 받을 경우 궤멸하기 쉽다. (한국에 주둔한) 부대는 장점이 되기보다 약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고 적고 있다. 미국은 이 같은 맥아더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예견하면서도, “한국은 전략적 가치가 희박한 지역”으로 판단하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단행한 것이다.

▲미 국무성의 ‘제한전’과 대립한 맥아더의 확전론(NSC68)
미국은 이후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 가능성이 높아지고 중국이 공산화되자, 1950년 4월 12일 기존의 전략을 수정한 ‘NSC68’을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소련의 제한적 선제공격을 예측하면서 “소련이 수행하는 제한된 목적을 패퇴시킬 군사력을 가지고 세계대전으로 확전시키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이익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를 둘러싸고 미 국무성과 맥아더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38도선을 중심으로 소련의 침략을 격퇴하는 수준의 제한전(Limited war)을 구상했다. 반면 맥아더는 38선 이북으로 진격해 만주와 접하는 북쪽 지역을 점령하는 '전쟁 확대'를 계획했다.
맥아더는 1950년 7월 “(한반도의 통일)은 만주에 매장된 자원의 출구를 제공하고 만주, 북중국과 비공산주의자들이 접촉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소련의 팽창이 저지됐음을 보게 될 것이고,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해) 전 아시아에서 소련의 정복을 피할 수 없다고 예상했던 사람들은 희망을 갖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맥아더의 ‘전쟁 확대’ 계획에 이용된 인천상륙작전
최 소장은 “이 같은 소련의 팽창 저지와 중국과 소련의 분리가 맥아더의 주된 관심사였으며, 이를 현실화한 수단이 인천상륙작전이었다”고 역설했다. 맥아더는 만주 접경까지 전쟁을 확대하기 위해 38선에 인접한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했고, 이에 필요한 전쟁물자 공급을 위해 인천을 완벽한 ‘안전지대’로 만들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인천을 초토화하는 ‘공중폭격’이 벌어졌고, 적대행위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목표 아래 가가호호를 뒤져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이 자행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6.25 전쟁 과정에서 벌어진 인천지역의 민간인 피해
6.25 전쟁 발발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1.4 후퇴, 재수복 등을 거치면서 수많은 인천지역 비무장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거나 미군 폭격에 희생됐다.
최 소장은 “인천경찰서와 동인천경찰서, 학익형무소 등지에 짐짝처럼 갇혀있던 민간인 수백 명이 대부분 정상적인 법적절차 없이 잔인하게 살해됐다”고 밝혔다. 특히 미군의 무차별 융단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엄청난 숫자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밖에도 강화도, 덕적도, 영흥도 등 인천지역 섬 지역에서도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군경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 건립된 6.25 전쟁 중 민간인 피해자 추모시설
충북 영동 황간면 노근리에는 6.25 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총격으로 사망한 인근 주민 300여 명의 원혼을 위로하는 13만㎡의 ‘노근리 평화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공원 유지를 위해 연간 6-7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1951년 2월 경남 거창에서는 이 일대 주민 719명이 통비분자로 몰려 육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거창군은 192억 원을 들여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는 거창사건 추모공원을 건립해 운영 중이며, 군 직원 8명이 공원 관리를 위해 상주하고 있다.
산청·함양에서도 130억 원을 들여 민간인 학살사건을 추모하기 위한 7만4000㎡의 공원을 건립해 운영 중이다. 대전에서는 오는 2024년까지 402억 원을 들여 1950년 7월 산내 곤룡골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사건 위령시설 10만㎡를 조성할 계획이다.
 

▲ 거창사건 추모공원

▲민간인 학살 피해자 추모에 인색한 인천
이 보다 더 큰 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인천에서는 피해자를 위한 추모시설은커녕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천지역에서 학살된 민간인을 추모하는 위령제는 월미도와 강화 단 2곳에 진행된다. 인천시는 이를 위해 월미도 위령제에 5백만 원, 강화위령제에 3백만 원을 1년에 한차례 지원하는 것이 전부다. 여기에 해당 기초자치단체가 추가 지원금을 보탠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격 규명 선행돼야
인천상륙작전을 ‘승전’으로만 기억하는 측에서는 인천 주민들의 피해에 대해 애써 눈을 감거나, 감내해야 할 ‘불가피한 희생’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가해자의 또 다른 한 축인 미국도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주기 위해 우리도 희생을 치렀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이해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오로지 미국의 안보 이익을 위해서 벌어진 일이라면, 승전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접근과 문제해결이 요구된다. 최 소장은 “가장 먼저 인천상륙작전이 어떤 목적으로 진행됐는가를 규명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그런 뒤 다른 어떤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과 피해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와 함께 피해 보상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정찬흥 논설위원·인천일보 평화연구원 준비위원 report6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