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 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는다.' 참 야한 시문이다. 그래서일까. 주위를 돌아보니 이곳저곳에서 옷 벗는 소리가 수도 없이 들려온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 코로나 시국에도 가을은 오는구나. 시름 깊은 날에도 계절을 느끼는 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있다는 건 추억한다는 것이다. 추억의 다른 말은 이별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추억은 미완의 사랑에서 잉태되었음을 알게 된다. 아픈 이별이 없었다면 사랑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이별이라는 절대불변의 정신적 가치는 우리 삶을 단단하게 여물게 했고, 우리를 눈물로 데려가고 느껍게 성숙시켰다.

'가을 노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픔 없는 사랑은 볏단처럼 서걱거리고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애틋하게 사랑하다가 갑작스레 다가온 이별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으나, 내밀한 가장 깊은 곳에서 발효액처럼 고여 온 생을 끌고 왔다. 그래서 사랑은 이별에도 아름답고, 다시 만나도 아름다운가 보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호젓한 오솔길을 걸으며 상념에 잠겨보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누구에게나 떠오르는 추억 하나쯤 있고,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조용히 사랑에 물들던 시절이 우리에게는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이다. 누군가 손짓하면 머뭇거리지 말고 달려가자. '앙상한 뼈'만 남아도 좋다. '이 세상 끝날 때 깊은 살 속에 담아가는' 사랑 하나 남길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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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