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걷히자 거기 금강산이 우람하게 솟아있었다. 지난해 12월12일 동해항 출항때부터 애써 다잡아왔건만 이 순간 만감이 오가는 착잡한 심정으로 하여 끝내 산 그늘을 보는 눈길을 흐리게 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지난 1947년 4월에도 「금강산」은 거기 있었다.

 이 겨레가 지닌 남북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평양을 등지고 원산을 거쳐 고성(舊 高城)역에 첫 발을 디디고 나서 다시 남천(南川) 십리길 봉수촌을 찾은 일이 있다. 당시만해도 시국에 눌린 불안심리에서 눈 앞에 펼쳐진 외금강의 절경은 고사하고 지척인 해금강마저 건성으로 보아넘겨야 했다.

 실로 「금강」과의 만남을 위해 52년의 긴 세월이 잰걸음 쳐 지났건만 돌아가야 할 고향은 여기서도 아직 수천리 밖이다.

 『한평생 꿈으로 영동(금강산)을 기다리다가 번거로운 세상 어느덧 백두옹 되었다오. 이제야 금강산 경개를 찾게되니 오늘 이길이 꿈속에나 아닌가 두렵소.』 이경석(1595~1671)

  夢想平生在嶺東

  紅塵空作白頭翁

  如今始得壽眞境

  還恐玆行是夢中

 …이처럼 자꾸만 산란해지는 가슴을 달랠수 있었던 것은 불녘에 계신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수려한 한하계(寒霞溪)곡에서 제를 올리고 난 뒤였다.

 나에게 있어서 과거는 물론 앞으로도 「금강」의 신령이 굽어 보는 선경(仙境)에서 이처럼 경건한 제례를 다시 치를 기회가 있을까 돌아보게 한다.

 이처럼 금강은 장중함과 자애로움을 더불어 지닌 영산(靈山)이라 할 수 있다.

 산은 높고 잘 세운 용처럼 솟구쳐 오르고 한편 계곡은 굽이 돌아가는 품이 때로는 엄하고 때로는 너그럽다.

 제 아무리 정선(鄭敾)의 세필 그림이 극명하다 해도 이를 다 그려내지 못했으며, 내가 즐겨 듣는 「알프스의 노을」(외스텐曲)이 주는 감동도 이 장엄한 자연이 읊는 교향악을 따르기에는 한참 미흡하다.

 칼날 같은 천태만상의 예봉에서 번져나오는 맑은 정기는 명리(名利)를 쫓는 잡동사니의 근접을 불허하는 고고함이 서려있고 기암절벽을 굽이 돌아 암반 밑으로 부서져 내리는 벽계수(碧溪水)는 번거로운 세사에 지친 몸을 씻어주고 남음이 있다.

 한마디로 극단의 조화를 이룬 대금강(大金剛)의 품안에는 도처에 만물상(萬物相)으로 둘러쳐졌고 지천하다시피 나서는 계곡 모두가 옥류동(玉流洞)이라 일컬음에 부족함이 없다. 일러서 인삼 녹용이 녹아있다는 「삼녹수」가 아니더라도 계곡물을 그대로 떠 마셔도 약수요 감로수 였다.

 비록 늙은 몸이 아이젠에 의지했던 고된 빙판길이기는 하나 고개들면 산허리를 빼곡 메운 수목잎이 떨어진 뒤인지라 개골산(皆骨山)의 이름 그대로 어느 지점에서나 「금강」의 빼어난 몸매를 드러내어 볼 수 있는 것은 겨울 산행만의 진수(眞髓)이다.

 특히 강품아래 삼선암(三仙巖)을 의지해 우러러본 만물군상과 어렵사리 찾아간 구룡폭포(九龍瀑布)에서는 때마침 매달려있던 집채만한 고드름이 떨어지며 굉음이 계곡을 메아리치게 한 장관은 몰아쳐온 눈보라와 함께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금강」을 극찬해도 따지고 보면 부처님 손아귀에서 으스대는 손오공(孫悟空)과 흡사한 꼴이다.

 고작 몇개의 짧은 선(線)과 몇개의 점(點)을 이어 본 데 불과한 이름 그대로 주마간산(走馬看山)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개인적 소망을 담자면 하루바삐 남북화해 기운이 일어나 육로편 금강관광이 트여 내처 고향방문이 실현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온정리(溫井里)에 위치한 「김현숙 휴양소」에 내걸린 현수막에는 「가는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구절이 보였거니와 정치적 이념색채만 배제한다면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번 여행을 통해 접한 북한동포의 참담한 생활상은 여기에 다 매거할 여지가 없어 장전(長箭)항을 불야성처럼 밝힌 「현대건설」의 현장과 어둠이 깔린 시가지를 대비하는 것으로 압축된다.

 항구내 정박중인 금강ㆍ봉래호의 웅장한 자태와 화려한 관광객의 행색을 바라보는 현지인의 시선은 몹시 착잡해 보였다.

 이점 「금강산관광」은 단순한 관광차원이 아닌 민족의 동질성을 찾음으로써 위화감을 체감케할 새로운 영지(靈地) 순례차원의 관광문화로 승화시켰으면 하는 의견이다.

 옥류동을 벗어나 신계사터를 통과할 즘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던 순박한 인상의 모녀 모습이 길가에 즐비하게 선 미인송(美人松)을 연상케 한다.

 크르즈여행의 마지막 저녁식사는 성찬이었지만 목이 메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렇듯 우리는 헤어져 돌아온 것이다.

 이튿날 15일 새벽 1시. 이상한 예감에 잠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선창밖에 무엇인가 너울 거렸다. 창가에 볼을 대고 보니 거기 밝은 불빛 속에 바다를 가르는 거센 포말(泡沫)위를 예기치 않은 밤갈매기가 떼지어 날고 있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눈을 부비는 그 사이 이번에는 북상하는 봉래호의 화려한 자태가 스쳐지나가고 더 멀리 오징어인가 양미리 낚시배인 듯한 불빛이 아련하다.

 갈매기 떼는 누구의 혼령인양 이어 뱃전을 맴돌며 남녘길을 따라잡고 있었다.

김경룡〈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