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동부 곡물운송로에 맞춘 762㎜ 협궤선 … 관광육성 위해 사람도 수송
광복 이후엔 '꼬마열차' 별명 얻으며 50년간 인천-경기 교류 기폭제로

 

철도는 식민 지배의 상징이다. 수인선 역시 그랬다. 일제는 소래 인근 염전지에서 생산된 소금과 경기 동부 지방에서 만들어진 곡물을 수탈하기 위해 수인선을 만들었다. 수인선 레일 간격이 표준궤인 1435㎜가 아닌 762㎜ 협궤로 만들어진 까닭도 수탈과 관련 있다. 수인선은 경기 동부 지역 곡물 운송로였던 여주~수원을 잇는 '수여선'을 인천까지 이어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 수여선이 협궤였기 때문이다. 1937년 8월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동 철도(수인선)의 사명은 강원도 벽지의 풍부한 물자를 인천항에 수송하는 동시에 군자·소래·남동 각 염전의 소금을 벽지에 수송하기 위함이라 한다'고 적혀 있다.

수인선은 물자 수송이 주기능이었지만 '여객'도 일부 담당했다. 일제가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조성한 송도유원지를 오가는 사람들의 다리가 돼 준 열차가 바로 수인선이다. 1937년 8월1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수인선 개통과 동시에 개장하게 된 인천 송도해수욕장 행의 여객에 대한 열차운임 할인은 15일부터 9월20일까지 실시한다'는 내용이 있다. 수인선이 본격적으로 여객 열차 기능을 하게 된 시점은 1945년 광복 이후다. 수인선은 '꼬마열차'라는 애칭까지 얻으며 인천과 경기 서남부권 교류의 기폭제가 됐다. 1988년 7월30일자 경향신문은 '수원~화성~안산~시여~인천 등 3개 시 2개 군 13개 역을 하루 3회 왕복하는 꼬마열차의 승객은 700~800여명. 승객은 경기만 농어촌에서 인천·수원을 통학하는 학생과 흙내음과 비릿한 바다내음을 풍기는 아낙네와 노인들. (중략) 특히 79년 9월에는 6.25 한국동란을 영화화 한 미국영화 오!인천의 현지로케를 수인선 기관차를 배경으로 한 뒤부터 관광객들이 많아졌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수인선은 애초 목적이 화물운송에 맞춰진 '협궤' 열차라 여객에 적합하지 않은 구조였다. 열차 폭은 2m 남짓해 덜커덩 거릴 때면 맞은편 승객 무릎이 닿을 듯할 정도였다고 한다. 동시에 1977년 수원~인천 간 산업도로 개통 등 산업화시기 교통 인프라 발달로 수인선 위상은 급격히 떨어져 1995년 수인선 복선전철화 사업 기본설계 착수와 함께 기존 협궤 수인선은 역사 뒤안길로 사라졌다.

/탐사보도부=이주영·김원진·이창욱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