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실 대한결핵협회 인천시지부 회장

필자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사립학교가 아닌 공립학교이지만, 길영희 초대 교장선생님이 남겨주신 교육적 생활지침은 아직도 삶의 커다란 길잡이가 되고 있다. 대학에 입학하여 전공선택 암석광물학 시험에서 열심히 공부는 하였지만 도저히 자신이 없었고, 같은 과 많은 학생들이 나름대로 시험에 대해 걱정을 하면서 시험 보는 좌석에 신경을 쓰며 옆친구와 나누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많은 걱정을 하였다. 하지만 해당 과목을 한 학기 더 듣기로 마음을 정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시험 당일 대부분 학생들은 뒷좌석이나 옆좌석으로, 가급적 시험감독교수 자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쪽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필자는 같이 다니던 같은 고등학교 출신 친구(후에 고려대 교수로 재직)와 함께 맨 앞자리 가운데 자리를 잡고 시험을 보기로 했다.

교수님은 당시로선 드문 암석광물학 여교수님이었는데, 시험지를 나눠 주시고 시험을 보는 동안 시험 감독보다 시험지에 날인하면서 계속 학생들 좌석을 확인하면서 학생들의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시험이 끝나자 시험지를 거두고 퇴실하셨다. 물론 매끔하게 시험지 정리를 잘 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친구가 있긴 했으나 필자는 제대로 시험 내용을 정리하지 못했었기에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나중에 학기말 학점 성적통지표를 받아본 필자는 스스로 놀랐다. 기대 이상의 성적이 나와 정말 기뻤다. 후일담으로 당시 그 여교수님은 학생들 시험 보는 좌석표를 만들어 학점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바르게 살다보면 늘 일상에서 손해만 보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된 계기였다. 물론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학창 시절 주었던 '양심교육'이 이제까지 살면서 힘들 때도 많았지만, 이런저런 유혹을 물리치게 하면서 스스로를 다그치며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만든 원동력이 돼 주었다. 어떤 윤리적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었고, 정신적 나침반이 돼준 분이었기에 지금도 가끔 필자의 마음속 커다란 등대처럼 존재하며 존경하게 된다.

성장기를 살면서, 많은 친구를 사귀면서 가끔은 '그러면 안되지' 하는 행동들을 보고 괴로워하며, 다음 번에 그 친구를 만나면 자꾸 눈을 돌려 피하게 되는 것도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진정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이들은 누군가에게 존경받기 위해 그런 삶을 산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분들 특히 교육자로서 자신을 이겨내고 제자들이 올바르게 살도록 가르치기 위해 산 것일 것이다. 어린 시절 때 유혹에 이끌릴 수도 있지만, 그 순간을 잘 참고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 삶부터 돌아보며, 제자들이 양심에 따라 시험을 보도록 하는 '무감독 시험'이 필자가 다녔던 고교에서는 시행됐다.

어느 땐 정말 '한 번쯤이야' '나 하나 쯤이야' '보는 사람도 없는데' '아무 일 없이 지나가면 그만인데' 하는 지극히 비정상적이지만 죄책감 없이 자연스럽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안 가면 된다는 식의 도덕적 해이가 실제로는 너무나 많다. 집단으로 행동하면서 굳이 애써 노력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무임승차가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만연돼 있다.

나이 든 지금, 인천에서 가장 큰 복지관을 오가면서 건강에 좋다는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중에도 그런 일그러진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답답함을 갖게 된다. 모른 척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그렇게 되면 잘못 교육 받은 것이 아닌가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건강에 좋은 강좌를 수강하기 위해 수강신청을 한 뒤 애태우며 컴퓨터 추첨 결과를 기다려 합격하면 단박에 수강료를 내고 다닌다. 하지만 지도강사가 바뀌면서부터 몇몇은 정상적인 수강 절차 없이 매시간 부정입실하여 스스럼없이 강사의 지도를 함께 받는 경우를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 수강생은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 '결석자 만큼 들어와 같이 수업받는데' 하면서 남 듣기 싫은 소리하길 주저한다. 불공정에 격분한 몇몇은 사무실에 찾아가 항의해 보지만 마지 못해 현장점검에 나선 젊은 사회복무요원은 나이 많은 어르신을 강제로 퇴장시키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런 행태가 젊은 사회복무요원에겐 어떻게 비쳐지겠는가.

'나 하나 쯤이야' 하는 선한(?) 양보가 집단 전체의 도덕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인식하고, 바로잡겠다는 사회적 정의가 무너지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질될까. 철부지 시절, 교장선생님이 작은 것에서부터 일깨워준 양심교육이 새롭게 다가오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