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주의 '조선의 쌀'을 탐하다

조선 서해의 넓은 곡창지대

일본군이 탐사하며 군침 흘려
▲ 인천 개항 이래 최대의 수출량을 기록한 햇벼 6만 석이 수출 선적을 기다리며 부두에 야적되어 있다. 쌀값 하락으로 인해 출곡기(出穀期)의 벼가 각지로부터<br> 인천항으로 밀려들었다.​​​​​​​ 이 쌀은 일본으로 수출된다. 1933년 11월 14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사진이다.
▲ 인천 개항 이래 최대의 수출량을 기록한 햇벼 6만 석이 수출 선적을 기다리며 부두에 야적되어 있다. 쌀값 하락으로 인해 출곡기(出穀期)의 벼가 각지로부터
인천항으로 밀려들었다. 이 쌀은 일본으로 수출된다. 1933년 11월 14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사진이다.

 

▲ 개항 이후 꾸준히 늘어나던 대일본 쌀 수출은 1930년대에 이르러 거의 절정에 이른다. 야적된 엄청난 양의 쌀가마와 함께 수많은 노동자들의 분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br>​​​​​​​쌀의 원 주인이었던 듯한 사람이 가마니 위에 올라서서 감회에 젖어 있는 듯하다.
▲ 개항 이후 꾸준히 늘어나던 대일본 쌀 수출은 1930년대에 이르러 거의 절정에 이른다. 야적된 엄청난 양의 쌀가마와 함께 수많은 노동자들의 분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쌀의 원 주인이었던 듯한 사람이 가마니 위에 올라서서 감회에 젖어 있는 듯하다.

 

일본이 인천 개항 전, 서해의 양항을 찾기 위해 서해를 탐사할 때, 배 안의 수병들이 망원경 렌즈로 제일 먼저 포착한 것은 아마 서해 일대 사방 어디에나 펼쳐진 논과 밭, 푸른 곡창지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름진 쌀밥을 배불리 먹는 상상을 하며 군침을 흘렸을 것이다. 마침내 세 번째 개항장을 남양만도, 아산만도, 또 전라도 어느 지역도 아닌 제물포로 낙점하면서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그 당시 보았던 조선의 넓은 평야가 각인되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같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그들이 제물포를 개항시키고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것이 조선의 '피', 곧 쌀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항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쌀과 콩 같은 곡물을 제물포항을 통해 퍼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서 잠간 '피'란 말에 대해 설명하자. 뒤에 언급하겠지만, 이 말은 근대 일본의 경제는 타국의 '피', 다시 말해 침략 전쟁을 통해 상대국의 '피'를 수혈 받음으로써만이 지탱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신태범 박사의 표현이다.

개항 후 명목상 수출 거래로 포장된 일본의 쌀 반출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실제 이 같은 현실은 개항 전야까지도 조선이 가장 꺼리고 걱정하던 일이었다.

제물포 개항은 실제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 시한으로 정했던 3년을 훨씬 넘긴 1883년에 이루어졌다. 그 7년 동안 국내의 반대와 일본의 흑심이 부딪쳐 이런저런 갈등이 있었던 것을 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다. 한 가지, 개항을 목전에 두고도 조선이 주저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쌀 문제였음은 분명하다. 조선정부는 제물포가 개항되면 쌀 유출로 인해 서울의 쌀값이 폭등함으로써 세민들이 소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점을 개항 불가의 이유로 들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정부는 1883년 7월 25일 재조선일본국인민통상장정(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 조약문에 가뭄·수해·병란 등으로 국내에 양식의 결핍이 우려되는 경우 수출을 금하되 1개월 전에는 일본 측에 통보한다는 규정을 넣는다. 그러나 이 방곡(防穀) 규정은 1893년 일본의 거센 항의에 의해 철폐된다. 이제 일본은 왜 그토록 다른 나라 침략에 매달렸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자.

일본의 근대사를 훑어보면 과다한 인구에 비해 국토가 협소하고 부존자원이 빈약한 관계로 때에 따라 타인의 피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만성빈혈증 환자의 증세를 가지고 처신해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것도 수혈 간격이 거의 10년가량이라는 사실은 한 번 받아들인 피가 10년밖에 지탱하지 못한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일본의 국가 발전에 따른 경제 곡선이 이러한 과정을 극명하게 실증하고 있다.

 

▲ 청일전쟁 직전, 한반도에 야욕을 가진 3국의 관계를 그린 풍자화. 1894년 프랑스 만화가 조르쥬 페르디앙 비고가 그렸다. <br>안경을 끼고 다소 어눌하게 생긴 청국인과 표독스러운 표정의 일본인이 낚시를 드리운 채 ‘Coree(조선)’라고 쓰인 물고기를<br> 서로 낚으려 한다. 다리 위에서는 러시아 군인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 청일전쟁 직전, 한반도에 야욕을 가진 3국의 관계를 그린 풍자화. 1894년 프랑스 만화가 조르쥬 페르디앙 비고가 그렸다.
안경을 끼고 다소 어눌하게 생긴 청국인과 표독스러운 표정의 일본인이 낚시를 드리운 채 ‘Coree(조선)’라고 쓰인 물고기를
서로 낚으려 한다. 다리 위에서는 러시아 군인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조선정부, 1883년 일본과 조약

양식 결핍 우려땐 수출 금지하되

1개월 전일본측에 통보 규정 명시

1893년 일본의 거센 항의 탓 철폐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가 내세운

'백가지 물화 유통, 이익 통할 것'

개항 명분은 애초부터 빗나간 감언

제물포항 주민, 검은 속내 모르고

부둣가와 배 위로 쌀 짊어지며

▲ 대략 10년 단위로 일으킨 침략 전쟁을 통해 남의 나라의 피를 빨음으로써 자국 경제의 발전을<br>꾀해 온 것이 근대 일본의 실체였다.1904년 러일전쟁을 앞두고 제물포에 상륙한 일본군과 그들의 군수물자를지게에 져 나르는 한국인 지게꾼의 모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 대략 10년 단위로 일으킨 침략 전쟁을 통해 남의 나라의 피를 빨음으로써 자국 경제의 발전을
꾀해 온 것이 근대 일본의 실체였다.1904년 러일전쟁을 앞두고 제물포에 상륙한 일본군과
그들의 군수물자를지게에 져 나르는 한국인 지게꾼의 모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버는 소득에 다소 만족했을지도

일본,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제물포에 미두취인소 열고

쌀·곡물 가격과 물량조절

미곡수탈·투기 야욕 드러내

 

 

 

 

 

이미 앞에서도 인용했던 신태범『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1868년 일본이 명치정부를 수립한 후, 1876년 무력으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해 개항의 길을 튼 데 이어 1883년 제물포개항,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군 합류로 승전국 대열에 끼는 등, 대략 10년 단위로 일으킨 무력 혹은 침략 전쟁을 통해 타국의 피를 빨아 자국 경제를 지탱해온 일본의 실체를 신태범 박사는 이렇게 명확하게 분석했던 것이다.

 

신 박사처럼 근대사 전반을 통해 일본을 특징지은 것은 아니어도 비슷한 뉘앙스의 글이 하나 더 있다. 전회에 소개한 바 있는 W. E.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에 그 같은 내용이 보인다.

▲ 1902년 7월 2일자 황성신문 기사이다. ‘지난달 28일 인천항에서 출범한 신농천환(信濃川丸)에 미곡 911포대를 일본 대판(大阪·오사카)으로 수출’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렇게 한국의 쌀은 대부분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 1902년 7월 2일자 황성신문 기사이다. ‘지난달 28일 인천항에서
출범한 신농천환(信濃川丸)에 미곡 911포대를일본 대판(大阪·오사카)으로
수출’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렇게 한국의 쌀은 대부분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줄곧 해군을 증강시키고 온갖 무기와 탄약, 야전장비, 의무 시설을 갖추고 군사들의 신체 단련을 마치자 일본인들은 마치 수부가 거인에게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기로 결심했다. 경작이 가능한 토지라고는 몇 조각밖에 없어 자신의 인구조차 먹일 수 없고 따라서 인구도 증가할 수 없는 이 나라는 더 이상 한 섬에만 은둔해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피스는 러시아와의 일전을 결심한 일본의 전쟁 준비가 일본 내의 부족한 식량 사정에 따른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무모하게는 보이지만, 자기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자신의 권리', 즉 강대국 러시아의 피를 원할 수 있는 권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러시아의 피는 결국에는 일본이 노리고 있던 대한제국의 피가 될 것이나, 그리피스는 싸늘하게도 일본의 이 같은 피의 요구가 어떤 정당성을 가진 듯이 기술하고 있다. 그리피스의 이 같은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일본이 식량 문제 때문에라도 저들 섬에서 뛰쳐나와 다른 나라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는 점만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애초부터 저들의 식량, 저들의 경제 원동력, 즉 조선의 피를 노려 개항에 매달렸으니, 그 당시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내세운 양국 간에 '백 가지 물화가 유통되고 이익이 통할 것'이라던 개항의 명분은 애초에 빗나간 감언(甘言)이었을 뿐이다.

한편 오랜 쇄국정책으로 인해 국제정세에 대해 전혀 무지했을 뿐만 아니라 누대에 걸쳐 빈곤의 굴레를 쓴 채 깜깜하게 살아온 제물포항 주민들은 이 같은 일본의 검은 속내를 알 리가 없었다. 따라서 조선의 쌀이 대량으로 반출되는 데 대한 걱정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부둣가에 산더미처럼 쌓인 쌀가마들을 배 위로 짊어져 나름으로써 소득을 얻는 생활에 다소나마 만족했을 것이다. 신태범 박사의 표현대로, 어쩌면 그들은 노동의 대가로 그날그날 현금을 받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신천지가 열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흑심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던 우매함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국제적으로 세력이 우월해진 일본은 1896년 5월, 제물포에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를 열어 쌀을 비롯한 곡물의 가격과 물량 조절에 나섰던 것이다. 이것은 곧 일본 상인들이 제물포항 객주들과 다투던 곡물 거래의 주도권을 탈취하려는 야심과 더불어 곡물 가격의 등락을 이용해 이득을 얻으려는 투기적 의도였다. 이로써 일본의 미곡 수탈은 더욱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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