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장마에 질리고 지쳤다. 역대 최장 기록을 세운 장마로 인해 전국 곳곳이 몸살을 앓는다. 여기저기 산사태와 강 범람 등으로 인명·재산 피해가 속출했다. 당한 이들의 가슴엔 피멍이 들고, 어디 하소연할 데도 마땅치 않다. 궂은 날씨가 지속되면서 한숨을 내쉬는 농부들은 '무심한 하늘'에 원망을 한다. '자연의 순환'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하다. 일부에선 해마다 되풀이되는 물난리를 놓고 인재(人災)라며 핏대를 올리기도 한다.

'가뭄끝은 있어도 장마끝은 없다'는 속담에서 알 듯, 긴 장마의 폐해는 아주 크다.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장맛비를 읊기도 했다. “괴로운 비 괴로운 비 쉬지 않고 내리는 비. 아궁이 불 꺼져 동네 사람 시름 많네. 아궁이에 물이 한 자 깊게 고였는데. 어린아이 돌아와선 풀잎 배를 띄우네.”(苦雨苦雨雨不休 煙火欲絶巷人愁 水生深一尺 穉子還來汎芥舟) 오죽하면 긴 장마를 '괴로운 비'라고 했을까.

조선왕조실록엔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고 적었다. 임금은 궁궐에서 초가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식음을 삼갔다. 신축하는 공사를 중지하고, 온나라에 금주령을 내렸다. 죄수들을 방면하기도 했다. 삼국시대엔 가뭄이 들면 왕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이 모두 근신했다. 임금이 천명(天命)을 잘못 받들고, 나라를 잘못 다스려 정사(政事)를 부덕하게 처리해서다. 하늘의 벌을 받는다고 인식했다.

기우제 반대말은 기청제(祈晴祭)이다. 기우제와 똑같이 기렸다고 전해진다. 온나라가 물난리를 겪으며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일은 고관대작들의 탓이란 말이다. 이래저래 홍수와 가뭄 등으로 고난에 휩싸이는 계층은 서민이란 점에서 정말 서글프다. 요즘 오랜 비로 인한 수해를 보며, 기청제라도 지내야 하지 않나 싶다. 이기적이고 못난 인간들에게 하늘이 벌을 내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노자 도덕경 제5장엔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拘),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聖人不仁 以百姓爲芻拘)'란 말이 나온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성인은 어질지 않아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결국 천지와 성인은 그대로 있는데, 인간들이 온갖 사욕을 채워 생기는 화(禍)를 말한다.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아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울 뿐이다.

하지만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추구하는 일은 힘들다. 당장 닥친 일을 헤쳐가기에도 벅차다. 내 몸도 '자연의 일부'라고 받아들이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느낀다. 그저 일상적으로 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먹고살기에 바쁜 서민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런데 집중호우에 피해를 당한 서민들이야 여북하겠는가.

이번 수해 여부를 떠나, 사람들은 천재(天災)든 인재든 하루빨리 복구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래도 어떤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복구와 지원은 조금 늦더라도 꼼꼼하게 이뤄져야 마땅하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빌면서. 그렇다고 몽땅 잊힐 리 없지만, 그냥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하늘의 조화'를 따라가긴 어려우리라.

가뭄엔 비가, 홍수엔 햇볕이 그리워진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조만간 비는 그치고, 우리는 언제 그랬는지 잊을 만큼 일상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편리함이 만들어낸 속성이다. 사람 마음의 간사함은 어쩔 수 없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성(人性)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듯싶다. 서로 사랑•이해•배려하면서도 한편으론 헐뜯고 시기하는 등의 심성(心性)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인식과 행위 등으로 지금의 문명을 이뤘다곤 하나, 새삼 되새길 만한 일이다.

문득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어 엎기도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하도 비와 물이 차올라서인지, 쉽게 연상되는 격언이다. 저마다 의견이 분분하면, 배가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도 생각난다. 이렇듯 하늘(자연)은 올곧은 뜻을 품고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정의와 공정 등 옳은 일을 마다하고,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벌이다간 그런 부정적 인식에 도달할 터이다. 주어진 '힘'을 과신하고 '약자'를 배척하며 횡포를 부릴 때, 하늘의 벌은 자연스럽게 내려진다. 정치권에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