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40대 여성
가정폭력 피해 동생 가족 오면서
집안일 도맡으며 자신 돌아보고
'필사'적 '필사'하며 시 쓰기 꿈꿔
▲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김이설 지음 작가정신 200쪽, 1만4000원

 

대부분이 그렇다. 무엇으로 돈을 벌고 살아야 하는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선명한 목표가 없거나 없었다.

“커서 뭐될래?”라는 질문에 정말로 구체적인 포부와 플랜을 밝힐 수 있었던 이가 얼마나 될까. 하고 싶은 일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 우연히 혹은 어쩌다보니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된 쪽이 더 많을 것이다.

여기도 한 여자가 있다. 변화나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놀이도 즐겨하지 않았다. 읽은 책을 또 읽거나 다 쓴 달력 뒷장에 빼곡하게 낙서를 하거나, 반듯하게 누워 천장의 벽지 무늬를 눈으로 따라가며 상상하는 걸 좋아하던 그녀를 누구는 게으르다고 말하고 누구는 세심한 성격이라 했다.

일정한 설계 없이 파도에 휩싸이듯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공시생이 되지만 그마저도 실패를 거듭하며 40줄에 접어든 여자다.

부모님의 낡은 빌라에서 계속 얹혀살 수밖에 없는 그녀에게 자의반 타의반 막중한 임무가 주어진다. 바로 남편의 가정폭력을 피해 아이 둘을 데리고 빌라로 들어온 동생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다.

아직 어린 남매에게 분유를 먹이고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여섯 식구의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그녀가 일분 일초를 아껴써야 하는 처지가 되면서 유일하게 바라는 게 생긴다. 바로 필사(筆寫)다….

김이설 작가의 장편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의 주인공 그녀는 지난하고 숨가쁘게 반복적인 시간 속에서 모순적이게도 자기를 오롯이 돌아보게 된다.

'필사의 시간'이란 글을 베껴쓰는, 유일하게 그녀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행위인 동시에 필사적으로 하루를 보내 획득한 시간이라는 중의적 의미다.

이 소설을 읽으며 때로는 환멸이며 보통은 지리멸렬한 여름밤이 정류장처럼 지난 끝에 그녀가 그렇게도 쓰고 싶어하는 시 한 편을 적을 수 있게 되기를 어느 샌가 바라게 된다.

또한 그 무수한 여름밤들이 그녀를 집어 삼켰던 것만이 아니라 그녀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시어(詩語)가 되었기를….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