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타빌더테라스, 하트리움 리버파크, 아카데미스위트, 우미린 에듀 포레, 미켈란쉐르빌. 외국의 거리나 주거지 명칭이 아니다. 우리나라 아파트단지 이름이다. 10여년 전부터 아파트명에 외국어를 붙이는 유행이 불더니 단어가 점점 길어지고 현란해져 간다. 때로는 국적이 아리송한 외국어도 등장한다. 본래 한글이었던 아파트명도 외국어로 변신하는데 그 재빠름이 놀랍다.

이를 두고 지난날 “시어머니가 못찾아오게 아파트 이름을 어렵게 만들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지만, 사실은 세련돼 보이는 외국어명칭이 아파트 재산가치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기대심리 때문이다.

실제로 아파트명을 영어로 바꾼 뒤 재미를 본 곳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의미가 없다. 거의 모든 아파트가 외국어 푯말을 달았으니 차별성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제는 '한국'이라는 국격과 브랜드 가치도 세계적인데, 이런 세태가 씁쓸하다.

더 민망한 것은 내국인이면서도 외국어로 된 이름을 갖고 보란듯이 연예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수년 전 대한항공을 이용했을 때의 일이다. 기내 TV에서 미국 영화가 방영되었는데 자막이 일본어여서 스튜어디스에게 연유를 물으니 “일본인들의 편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일본인은 중요하고 우리나라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되물으니 더 이상 답변이 없다. 선진국일수록 민족 자긍심이 강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민간 영역은 그렇다 치더라도 공공기관이 외국어 사용에 집착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문화체육관광부가 15개 광역자치단체의 보도자료를 분석한 결과 8509건 중 8386건에서 외국어가 1개 이상 등장했다. 자치단체가 실시하는 정책에도 외국어는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인천 중구는 국내 최초로 누들(국수)을 주제로 한 복합문화공간인 '누들 플랫폼'을 북성동•신포동 일대에 오는 11월 개장하기로 했다. 하지만 대표적 서민음식인 국수를 영어로 표기해야 했는지, 굳이 언어 연관성이 떨어지는 '플랫폼'이라는 말을 접목시켜야 했는지 의문이 든다.

경기 부천실버인력뱅크는 노인일자리 역량을 강화하는 '시니어 리더스쿨'을 운영했는데 참가한 노인들이 거창한 명칭에 헷갈려 했다고 한다.

인천시는 한술 더 뜬다. 연말에 문을 열 바이오 집적단지를 '스타트업파크'라고 이름지었다. 수요응답형 교통체계를 'I-MOD'라고 하는데, 인천시가 추진하는 'I-멀티모달' 서비스 중 하나라고 한다.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대강의 설명도 없이 자료를 내놓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정책 입안자는 정확한 의미를 알고 이러한 용어를 사용했는지 궁금하다.

청라지구에 들어설 영상문화단지는 '스트리밍시티'라고 명명했으며, 시가 조성비용을 지원하는 친환경 업무공간을 '오피스가드닝'이라 칭했다. 현란하기 그지없다. “시민들이 쉽게 알지 못하게”라는 농담이 나올 만도 하다. 부분별한 외국어 사용은 정책 입안 취지를 흐리게 하고, 시민들의 이해도를 떨어뜨릴 수 있어 정책 실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정성 없이 작위성만 노출된다는 지적도 피하기 어렵다. 이런 행태는 50대 이상에게 신(新)문맹을 일으킬 수 있다.

아예 공공기관 명칭을 외국어로 바꾸는 현상도 흔하다. 한국철도공사는 공식적으로 '코레일(KORAIL)'로 불리며, 한국토지주택공사는 'LH'에 주 명칭 자리를 내주고 보조명으로 전락했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정식 명칭이 'K-water'다. “이게 나라인가”라는 말은 이럴 때 한번쯤 등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공공기관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외국어 사용에 앞장서는 모습은 해괴하다. 이러면서도 한글날만 되면 세종대왕을 기리고 한글의 우수성을 들먹이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