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인천은 그야말로 초토화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집중 포화로 인해 곳곳이 잿더미로 변했다. 세계 전사(戰史)엔 길이 남을 작전이었지만, 인천으로선 그 결이 달랐다. 전쟁이 안겨준 피폐함이야 어디 인천뿐이겠는가. 그래도 1883년 개항 이후 60년 넘게 이룩했던 '아름다운 도시'는 하루 아침에 쑥대밭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전쟁의 참상은 두 눈 뜨고 마주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인천의 경우 비록 일제가 계획적으로 세웠다곤 해도, 멋들어진 '풍경'이 아주 많았다. 세상 으뜸으로 치며 각광을 받는 게 수두룩했다. 우리나라 '최초·최고'의 명성도 그냥 얻어지지 않았다. 인천항을 통해 서양 문물이 서울로 올라가기 전 머무르면서, 인천은 '개화의 첨병' 노릇을 했다. 인천인들이 이를 만끽했음은 당연했다. 서울을 비롯한 8도 각지에서 사람들이 인천을 '구경'하고자 몰렸다고 전해진다.

이랬던 인천은 결국 6·25전쟁을 치르면서 풍성했던 '유산'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 후 겪은 냉전(Cold War) 체제 속에서 전국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데가 인천이다. 외국으로 뻗어 있던 뱃길도 끊기고, '서울의 그늘'에서 서러움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 시련과 아쉬움이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겠지만, 이젠 '도시재건'에 성공하면서 전국 최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인천의 모습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아무튼 인천상륙작전 참화 속에서도 무사한 곳이 있다. 중구 지역은 상륙작전과 직접 맞물려 폐허화했지만, 답동성당(중구 답동)은 몇몇 살아남은 시설물 중 하나로 꼽힌다. 답동성당(사적 제287호)이 세워진 때는 1897년이다. 파리외방전교회 포교활동의 일환으로 지은 후,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며 오늘에 이른다.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고통을 받는 이들의 안식처로 자리를 잡은 답동성당은 지금까지 교육·의료·사회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시민들은 정신적·신앙적·문화적 유산의 가치를 띤 요람으로 여긴다. 시내에 고층건물들이 들어서 복잡해지기 전인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뚝 선 답동성당은 멀리서도 보이는 지역의 '이정표' 구실을 했다.

중구는 이런 답동성당을 관광자원으로 삼기 위해 이태 전부터 힘을 쏟아왔다. 관광자원화 사업을 추진하려면, 문화재청의 문화재 현상 변경 심의가 필수적이다. 사업을 벌이는 데 가장 큰 고비. 그런데 문화재 심의위원들은 구에서 내놓은 설계안을 마뜩지 않게 여겼다. 국가지정문화재인 답동성당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심의를 부결했다. 그러자 성당 신도와 인근 주민들이 나서 사업 부지에 대한 보행 불편함 등을 호소하고, 구는 용역을 발주해 전문가 자문을 받는 등의 노력 끝에 얼마 전 심의를 통과했다. '선교역사'를 넘어 이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답동성당이 '인천의 역사'를 두루 굽어 살피기를 기대한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