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명의 관객만 있다면...나는 광대입니다

▲서커스 사랑, 통째로 사버렸다
1962년 황금기 입단해 동춘 명물 됐지만
집안 반대와 쇠퇴기 접어들며 고향으로
1978년 서커스장 붕괴로 매물에 나오자
한국 공연예술 뿌리 사라질까 싶어 인수

▲창단 후 최대 위기는 지금…그럼에도 '연중무휴'
코로나로 관객 발걸음 현저히 줄었지만
95년 역사 숱한 시련 속 버팀목은 관객
세계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는 문화유산
전용극장 마련돼 100년의 역사 맞았으면
 

곡예사의 아찔한 공중 묘기에 탄성이 절로 난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곡예사의 몸짓 하나, 손짓 하나에 관객들은 가슴을 졸인다. 화려한 묘기의 향연이 끝난 뒤 터져 나온 박수 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동춘서커스는 올해로 95년째 명맥을 이어온 대한민국 곡예 예술의 자존심이다. 안산 대부도 동춘서커스 상설공연장에서 이 시대 마지막 광대, 박세환(76·사진) 단장을 만났다.

#100년의 역사 앞 둔 동춘

동춘서커스가 안산 대부도에 자리한 지 올해로 10년. 코로나19라는 창단 이래 최대 위기 속에서도 동춘서커스는 연중무휴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서라도 공연을 멈추지 않는 것이 박세환 단장의 원칙이다. “연간 15만명의 관객이 서커스 공연을 봤습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관객의 발걸음이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공연을 쉬지는 않습니다. 하루도 쉬는 날 없이 공연했다는 건 세계 어느 역사에도 전례 없는 기록이죠.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서라도 동춘의 막은 오릅니다.”

동춘서커스는 1925년 목포에서 출발했다. 일본인의 서커스단 직원이었던 박동수(호 동춘)가 문화 식민정책을 앞세운 일본식 서커스에 대항하며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서커스단을 만들었다. 조선 땅에 세워진 최초의 서커스가 바로 동춘서커스이다. 당시 서커스는 TV가 없던 시절 최고의 대중문화였다. 동춘서커스가 떴다 하면 빅탑(서커스 대형천막) 안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몰려들었다. 묘기면 묘기, 연극이면 연극, 노래면 노래. 몇 번을 봐도 또 보고 싶은 게 서커스였다. 그 시절 박 단장도 동춘서커스에 마음을 빼앗겼다.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 동춘서커스가 경주에 왔죠. 악대부에서 트럼펫을 다루며 배우의 꿈을 꾸던 제 마음에 동춘서커스가 들어왔습니다. 연극영화과가 없던 시절이라 동춘서커스에 들어가면 연기나 노래를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수원 지동에 있던 동춘서커스로 찾아갔습니다.”

 

#슈퍼스타는 '동춘'으로 통한다

동춘서커스는 남철, 남성남, 이주일, 장항선, 서영춘, 배삼룡 등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들이 거쳐갔다. 그야말로 동춘서커스는 스타가 되기 위한 등용문이었다. 전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재주꾼들은 모두 동춘서커스로 몰려왔다. 박 단장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입단했던 1962년만 해도 서커스는 황금기였다. 단원만 150여 명에 달했다. 박 단장은 이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매일 밤 구슬땀을 흘러가며 재능을 키웠다. “처음 입단해서 몇달 동안은 잔심부름을 하며 지냈죠. 얼마쯤 지났을까 인기스타였던 남철로부터 공연 진행법을 배우게 됐습니다. 진행자의 역량이라 하면 재치있는 말솜씨는 물론 배우들을 대신해 불시에 투입될 수 있는 연기력, 심지어 귀공자 같은 외모까지 겸비해야 했죠. 성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동춘의 명물로 거듭났다. 오로지 그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소녀팬들이 찾아왔다. 박 단장은 유명 배우들 인기 못지않은 동춘이 배출해 낸 최고의 슈퍼스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탄탄대로를 달리던 동춘서커스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방송국이 하나, 둘 개국하면서 관객들은 서커스 공연장보다 TV를 찾아갔다.“TBC 드라마 '여로'가 인기를 끌면서 서커스 구경을 오던 사람들이 TV가 있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동춘의 인기는 시들해져 갔지요.”

박 단장은 동춘서커스 입단 10년이 지났을 무렵 서커스단을 그만두고 부산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가문에서 서커스단 생활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동춘을 그만두지 않으면 '쥐약 먹고 죽겠다'고 하시던 할아버지 손을 차마 뿌리칠 수 없어 결국 경주로 다시 내려갔습니다. 이듬해 부산 국제시장 안에 있던 부산극장에서 선전부장으로 일하게 됐지요.”

부산에 있으면서도 그의 생각은 오로지 동춘에 쏠려 있었다. 1978년 인천 남동구 간석동에서 공연 중이던 동춘서커스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후 동춘서커스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 박 단장에게도 전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 공연예술의 뿌리인 동춘이 없어지겠다 싶었습니다. 결국 선전부장을 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인수를 했습니다. 이때부터 박세환표 동춘서커스가 시작됐지요.”

 

#태양의 서커스?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95년 동춘서커스 역사가 있기까지 박 단장은 숱한 좌절과 시련을 마주했다. 2003년 추석에 불어닥친 태풍 매미에 모든 것이 휩쓸려 가기도 했고, 신종플루니 사스니 각종 감염병에 시달려야 했으며, 경영난에 문 닫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동춘서커스에 버팀목이 된 건 관객이었다.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죠. 위기가 찾아올 때면 관객이 동춘서커스가 없어질세라 찾아왔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면 금 모으기 운동을 방불케 할 만큼 많은 관객이 동춘을 지켜주셨습니다.”

전국을 호령하던 30여 개의 서커스단이 위기 속에 하나둘 사라져 갔고, 현재 동춘서커스만이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내 굴지의 곡예 문화 콘텐츠로 자리한 동춘서커스는 세계적인 서커스단인 '캐나다 태양의 서커스'와 비교되곤 한다. “동춘서커스 곡예단의 수준은 세계 최고입니다. 절대 태양의 서커스에 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곡예를 하기엔 작고 가벼운 체격의 동양인들이 최적이죠. 태양의 서커스처럼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이뤄졌다면 세계 최고의 서커스는 동춘서커스가 됐을 겁니다.”

100년 역사까지 앞으로 5년, 동춘서커스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많은 이들이 떠나갈 때도, 숱한 위기 속에서도, 우직하게 동춘을 지켰던 박 단장. 그가 수년 전부터 줄기차게 외쳐오던 바람은 단 한 가지다.“남녀노소 3대가 즐겨찾는 대중문화이자 문화유산인 서커스 전용극장이 마련돼야 합니다. 전 세계 어디를 봐도 서커스 전용극장이 없는 곳은 대한민국뿐입니다. 심지어 북한에도 서커스 전용극장이 3곳이나 있지요.”

동춘서커스의 100년 역사를 서커스 전용극장과 함께 써갈 수 있기를 박 단장은 소원한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