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진학 대신 '깔머슴' 일하다 14살 상경
기술 배우러 모자 공장 취업하며 광명과 인연
시의원직 중도 사퇴 아픔 배움으로 승화시켜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암 투병 중이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당시 집안 사정은 끼니 걱정을 할 정도였다. 중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뜻한 쌀밥 한 그릇 먹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남의 집 머슴살이를 자처했다.

이듬해 서울로 올라갔던 형이 어머니 제사를 위해 내려왔다. 말로만 듣던 서울. 형에게 서울 가고 싶다고 했다. 곡성역에서 용산역까지 차비가 650원이던 시절이다. 그렇게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상경했다. 기차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초콜릿을 먹었다. 그때 먹었던 초콜릿의 맛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생경한 초콜릿의 맛은 서울이라는 부푼 기대감으로 뇌리에 남았다.

광명시의회 6대 후반기 의장을 지내고 7대 의원에 당선된 후 현재는 광명시 소하동에서 착한 요양원을 운영하는 정용연(60·사진) 대표의 이야기다.

매일 끼니를 걱정하다가 쌀밥 먹을 생각에 부잣집 '깔머슴'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정 대표는 울컥하기도 했다. 머슴을 대표하는 상머슴 아래에서 땔나무나 꼴 베는 허드렛일을 하던 머슴을 전남 사투리로 '깔머슴'이라 불렀단다.

14살 정용연에게 서울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중국집에서 배달 일을 시작으로 신문 배달, 구두닦기, 파지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먹고 사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이미 깨달았다.

“어느 날 동네 친구의 누나가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누나의 조언이 가슴에 남아 모자 만드는공장에 취업했습니다. 손재주가 있었는지 봉제 기술을 현장에서 습득했습니다. 이후 모자 공장에서 일하면서 우리나라 경제가 좋아졌습니다. 모자가 패션에서 중요한 포인트로 자리를 잡으면서 21살에 공장을 시작했습니다.”

남이 만들지 않던 스포츠 모자를 이태원에 납품하면서 약간의 부침은 있었으나 돈을 벌기 시작했다.

미싱 기술을 배우던 20대 시절, 고통과 억압받는 노동자 인권을 생각했던 정 대표는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했다. 민주화 시위가 자주 벌어지던 서울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고민하며 투쟁했다. 광명시의원에 출마한 계기도 맥을 같이한다.

광명시와의 인연은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 대표가 일하던 구로공단 모자공장 기숙사가 하안 1단지였다. 그렇게 시작된 광명시와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4형제가 모자 공장을 함께 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은 극복했습니다. 현재도 동생이 당시 창업했던 ㈜에이스 모자를 잘 경영하고 있습니다.”

재선의원이던 2014년, 불미스러운 일로 광명시의원을 자진 사퇴한 그는 자숙하면서 삶을 돌아봤다.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내야 했던 정 대표는 공부를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 큰 나락으로 빠질 것 같았다.

2016년 2월 경,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4월 중등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같은 해 8월10일, 고등 검정고시를 패스했다. 수행하는 마음으로 공부에 전념했던 진심이 통했는지 12월6일, 2017년도 국민대 경영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대학에 입학해 20대 학생들과 생활하며 1, 2학년 때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20대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3학년부터는 적응이 됐고 4학년 2학기만 남았습니다.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공부에 전념했던 것이 뿌듯합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5년간 아픈 시간을 보내야 했던 정용연 대표는 “지금도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제 실패 극복의 경험담이 도움되길 바란다”면서 “암흑 같았던 5년의 아픈 시간이 전화위복된 것 같다”고 밝혔다.

/글·사진 광명=장선 기자 now482@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