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의 용이었던 황신입은 안타깝게도 평양의 유수 대학을 가정형편으로 자퇴하고 3급 지방산업공장 기계공장에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북한사람들 역시 우리나라처럼 노동자나 농민과 같은 육체노동은 기피하며 사무직을 매우 선호한다.

주위에서 수재라는 소리를 늘 들었던 황신입에게 있어 공장노동자란 밑바닥으로의 전락을 의미하였다. 황신입이 공장에 들어가던 당시 그의 심리상태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이 공장은 200명 정도가 소속되어 있었지만 약 100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출근하였으며 생산을 멈추고 도로수리 등의 동원노동이나 더벌이로 노동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반전은 황신입이라는 젊은 20대 노동자가 공장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그는 아버지뻘 되는 공장 노동자들과 같이 일하면서 힘과 위로를 얻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내 문제가 우리의 문제’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황신입은 예순이 넘은 어떤 늙은 노동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아저씨를 만나는 재미로 공장을 다녔다. ‘세상에 무슨 일이 와도 닥쳐나갈 수 있는 그런 게 있는’ 사람이었다.

위에서 떨어지는 사회적 과제는 주로 길을 닦는 도로수리 정도의 막노동이었지만, 그는 여러 동료들이 함께 하기에 부끄러운 줄 몰랐으며 심지어 즐겁기까지 했다.

나이든 아저씨들과 어울려 함께 일하고 노는 가운데 불안했던 청년의 심리는 안정되었고 그는 세상 그 무엇도 다 받아들일 것 같다는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공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도로 수리나 건설과 같은 동원노동을 하면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달리던 엘리트의 길이 아니라 인생에 다른 길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처럼 새로 직장에 진출하는 사회정치공동체의 기본 단위인 북한 공장 공동체의 힘은 아직도 크다. 공동체의 힘. 즉 집단주의가 갖는 정서적 교감은 오늘날까지 북한 노동자들과 공장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힘이 되고 있다.

/김화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위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