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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더는 나를 찾지 말라” 특수임무수행자의 가족사
[6.25전쟁 70주년]“더는 나를 찾지 말라” 특수임무수행자의 가족사
  • 박정환
  • 승인 2020.06.29 16:51
  • 수정 2020.06.29 1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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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태생 생부 20살 K.L.O 8240부대 입대

- 어머니는 혼신신고 없이 두 딸 혼자 키워

- 두 딸은 초등학교 입학 앞두고 출생신고

- 33년 뒤 상봉한 생부, 원망보다 측은함 커

- 보내지 못한 편지 ‘조강지처에게’ 눈시울

 

특수임무수행자 김학림 씨의 생전 모습

 

2014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박영애(65) 특수임무유공자회 인천지부 유족대표 명예회장의 아버지 김학림 씨는 1950년 10월 켈로부대(K.L.0 8240) 1기로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

평안북도 강계시 남산동 태생인 김 씨는 평양상업고등학교를 나온 뒤 홍익대학교 국문과 2학년생으로 홀로 서울서 유학 중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강계시 북문한방병원 원장이었다.

전쟁통 서울에 의지할만한 곳이 없었던 김 씨는 외사촌 형인 이태화 씨를 찾아갔다. 이 씨의 집에 더부살이를 부탁할 요량이었다. 이 씨는 당시 미 극동사령부 소속 소령이었다.

이 씨는 기거 대신 김 씨에게 입대를 권유했다. 6개월 정도 군대 생활하면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꼬드겼다. 김 씨는 학교를 그만두고 이태화 씨 동생 응화 씨와 함께 입대했다.

 

끝내 보내지 못하고 유품함에서 발견된 조강지처 한기순 씨에게 쓴 김학림씨의 연하장

 

김 씨가 배속된 곳은 인천시 중구 답동 신흥초등학교 맞은편 켈로부대 산하의 4864 첩보부대였다. 그곳에서 18개월 동안 특수임무 교육을 받았다. K.L.0 8240부대는 6·25 전쟁 당시 주한 미 극동사령부 소속으로 현재 특수전 사령부의 모체이다. 군번은 없지만, 한국군 최초의 유격부대였던 셈이다.

켈로부대의 중심 조직은 북에서 내려온 청년이나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북한 말씨를 쓰고 지리에도 밝았던 터라 북파공작원으로 제격이었다.

김 씨가 영애 씨의 생모 한기순(2020년 1월 작고) 씨를 만난 것은 신흥동과 답동에서 특수임무 요원으로 일하던 때였다. 당시 한 씨는 17살로 5년제 미추홀여중 2학년을 다니다가 자원해서 중구 송월동 근처 부대의 군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경찰이었던 그의 큰 오빠가 6·25 당시 인천을 점령한 북한 보위부원들에게 맞아 죽어 공산주의자 하면 이가 갈리던 터였다. 3년을 군무원으로 있으면 중학교 졸업장까지 준다는 학교 측의 약속도 있었다.

출퇴근길 김 씨와 한 씨는 서로 눈을 마주치는 시간이 잦아졌고, 애틋한 정도 싹텄다. 1953년 둘 사이에서 영애 씨의 언니가 태어났다.

김 씨의 북파공작원 임무는 계속됐다. “일이 있어 며칠 다녀올게”라며 한동안 모습을 감추곤 했다. 첫 북파 때 비행기에서 낙하하던 중 바람에 떠밀린 낙하산이 나뭇가지에 걸려 북한 인민군에게 붙잡히기도 했다. 적의 부대로 끌려가던 중 낭떠러지로 몸을 던져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평양 등지의 북파는 걸핏하면 있는 일이었다. 1·4후퇴 전에는 평안북도 선천과 신의주까지 갔다가 중공군에 쫓겨 내려오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옹진군 장봉도 등지에서 첩보대원(HID) 훈련교관으로 일했다. 1955년의 일이었다. 홀로 딸을 낳아 키우던 한 씨는 수소문 끝에 남편이 장봉도 부대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고생해서 만난 남편의 첫 마디는 ‘더는 나를 찾지 말라’는 것이었다. 김 씨는 울고불고하는 한 씨를 달래며 하룻밤을 보냈다. 이렇게 태어난 둘째 딸이 박영애 명예회장이다.

 

외갓집서 더부살이 하던 박영애 씨의 어릴 적 모습

 

그 뒤 김 씨는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사이 한 씨는 딸 둘을 혼자서 키웠다. 영애 씨가 태어난 지 8개월이 지났을 때 한 씨는 또다시 김 씨의 흔적을 캤다. 남편이 서울 강북구 우이동 골짜기 부대에 있다는 풍문을 듣고 한 씨는 두 딸을 데리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남편을 만날 수 없었다. 위병 요원을 되레 한 씨에게 불같이 화냈다. “당신의 남편은 죽었소. 며칠 안에 전사통지서가 집으로 날아갈 테니 다시는 남편을 찾지 마시오.” 남편 김 씨가 위병 요원에게 시킨 충격요법이었다. 가족들에게 해가 갈 것을 우려한 김 씨의 마지막 배려였다. 남편의 전사소식 충격에 한 씨는 6개월 동안 앓아누웠다.

청상과부 신세인 딸을 애처로워하던 영애 씨의 외할머니는 둘째 아들이 운영하던 주유소의 총무 박 씨에게 간청했다. 혼인신고조차 못 하고 애 엄마가 된 딸을 거둬 달라는 당부였다. 큰 소녀 딸이 초등학교 갈 때가 됐는데도 출생신고가 안 됐던 탓이었다. 김 씨로 태어난 영애 씨가 박 씨가 된 이유다.

서울로 이사 간 박 씨 가족들은 단칸방서 생활했다.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아 절집에서 묵은 밥을 가져다가 데워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영애 씨는 그의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사탕과 나무젓가락 등 가내수공업 공장을 돌고 돌았다. 서울 신 평화시장 옷가게 점원이 시집가기 전 사회생활에서 받은 최고의 대우였다.

생부 김학림 씨가 둘째 딸 박영애 씨에게 보낸 편지

 

1989년 7월 6일. 어머니 한 씨는 인천서 사는 영애 씨의 생일을 축하하고 돌아가는 길에 경인 전철 안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김 씨와 우연히 마주쳤다. 1966년 육군 상사로 제대한 김 씨는 결혼해 아들을 두고 있었다.

영애 씨에게 ‘김 씨 아버지’는 원망보다는 측은함으로 다가왔다. 대한민국을 사랑한 죄로 가족도 버린 채 타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생부의 가여운 삶을 끌어안았다. 영애 씨는 더 많은 ‘김 씨 아버지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나서고 있다.

홍광식 특수임무유공자회 인천지부장이 서구 금곡동 무궁화 추모동산 농막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

 

전쟁터에서 혹은 적지서 쓸쓸히 산화한 특수임무수행자의 넋을 기리는 무궁화 7532그루의 추모 동산이 그것이다.

/박정환 기자 hi21@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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