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1일 작성한 즉결처분자 36명 명단
여자경찰 7먕의 육필
▲20대 여자경찰이었던 이흥록씨는 자수서, 고백서를 비롯해 “조국과 인민을 위해 싸우겠다”는 서약서까지 남겼다. /출처=국립중앙도서관

 

▲이홍록_예심표 /출처=국립중앙도서관
▲이홍록 자수서 /출처=국립중앙도서관

‘인천시 정치보위부’가 1950년 8월1일 작성한 즉결처분자 36명 명단에는 여자경찰로 봉직했던 7명도 포함돼 있다. 이들이 보위부에 제출한 자술서와 서약서 등을 통해 자료가 미미한 인천여자경찰서의 한 페이지를 채울 수 있게 됐다.
 

▲인천여자경찰의 삶

인천 창영동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마치고 21살에 여자경찰이 된 1928년생 김정옥은 경찰 전 인천타이피스트양성소를 다녔다. 50만원 정도 되는 재산이 있었던 그녀는 1948년 5월28일 개성에 있는 경찰학교에 입학해 15일간 강습을 받고 여자경찰이 된다. 인천여자경찰서에서 약 2년을 근무하다가 6·25 전쟁이 터진 지 불과 13일 만인 7월8일 '반역행위' 혐의로 보위부에 체포됐다. 그녀는 보위부의 협박에도 끝까지 “대한민국을 위해 일했습니다”라는 소신을 보였고, 그녀를 취조한 보위부는 "리승만의 주구"라고 여자경찰 김정옥을 깎아 내렸다.

'마쯔다'란 별명으로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인천 송림동에 살고 있던 여자경찰 정민희는 함께 붙잡힌 여자경찰 중 나이가 가장 많은 1903년생이다. 충남에서 선생님으로 약 3년간 근무했지만 돈이 모이지 않자 직장을 구하러 인천에 왔다. 그녀가 취직한 회사는 인천고무공장. 그녀의 남편은 인천에서 이발업을 했다. 그리고 약 12년간 행적이 묘연하지만 1946년 5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인천여자경찰서 순경으로 들어가 경사까지 승진했다.

1950년 7월7일, 그녀를 붙잡은 보위부는 “정민희는 북방부 정책을 반대하고, 남반부 정책을 지지하는 사상으로 인천여자경찰서에서 활동했다”면서도 “주로 남녀의 풍기문란 단속 등으로 활동했고 정치범 등을 취급한 사실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훈계 석방시켰다. 

평양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평양식산은행과 평양상업은행을 다니다 1947년 월남한 23세 이춘성은 두 달가량 인천여자경찰서 간수로 근무한 게 화근이 돼 보위부로 끌려갔다. 다행히 그녀를 취조한 예심원이 “간수로 근무한 사실 이외에 없다”며 석방을 명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24살 여경 이흥록은 어떻게 됐을까. 검단에서 태어나 송림동에 살던 이흥록은 경찰형사와 약혼한 사실이 알려지며 보위부 눈 밖에 났고, 이에 그녀를 취조한 보위부는 “악질적 여순경이다. 인민재판에 회부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인민재판에서 살아 남았을까.

▲북한 황해도 출신인 김영선씨는 6장의 고백서를 남겼다. /출처=국립중앙도서관
▲정영자씨가 남긴 자백서  /출처=국립중앙도서관

▲생의 몸부림

경찰로 근무 중이던 정재학의 고백서는 첩보영화를 보는 것 같다. 

평양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인천으로 온 정재학은 인천대양기선회사에서 남로당원을 만나 사상 전향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미군부두에 취직했다. 정재학은 “불경기로 퇴사 후 미군부두에 취직했지만 미군의 야만적 행동에 분개해 사직 후 경찰이 됐다”고 설명했다. 인천경찰국 회계과에 근무 중이던 1949년 보위부의 남한 비밀 조직인 '8인조당'에 가입했고, 암호명 '팔에김(八金)'으로 활동하며 북한과의 연락소를 서울 무교동에 설치했다. 그는 경찰 내 간첩이 돼 남한의 경찰관 명단과 경찰서 지출액 등을 북한에 전달했다. 

인천 경동 국일관 주인인 박수봉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경찰관으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인천재판소 서기로 근무하다가 재물죄 혐의로 2년 반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권총을 갖고 다니면서 해군경비부 헌병대 특무 정보원이 돼 인천에서 몰래 활동 중이던 남로당원을 잡았다. 또 대한군사협회 경기도지부 감찰위원장으로 군에 자금을 조달했다. 

체포됐을 때도 권총을 갖고 있던 그는 보위부 수색 당시 숨어 있다가 당시 인천시민위원회의 밀고로 붙잡혔다.

/이주영·이순민·김은희 기자 leejy96@incheonilbo.om

 


[정치보위부 자료 공개한 조우성 주필]

"전쟁 때 질곡의 삶과 어떤 수난을 겪었는지 보여주는 역사의 단면"

▲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70년 전 인천에 살며 전쟁 한복판에서 참혹함을 겪은 삶의 조각들은 그동안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잠들어 있었다. 지난 2008년 국립중앙도서관이 ‘인천 정치보위부 즉결처분자(1950년 8월1일)’ 원본 자료를 찾아내 전자 기록화했다. 그 후로도 10년 넘게 빛을 보지 못했던 인천시민 수난사는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낸 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손끝에서 되살아났다.

조우성 주필은 24일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의 인천 관련 자료를 연구하다가 올 초 정치보위부 관련 문서를 발견했다”며 “전쟁 당시 인천시민들이 질곡의 삶을 살면서 어떤 수난을 겪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단면”이라고 말했다.

조 주필을 정치보위부 기록물을 읽으면서 “가슴을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먹고 살려고 인천에 모여든 사람들이 전쟁통에서 직업 때문에,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심문받고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며 “구술이 아닌 실물 자료를 보면서 전쟁의 실상을 새삼 절감했다”고 말했다.

1950년 6월25일 그날, 조 주필은 세 살이었다. 중구 경동에 살았던 그의 기억에는 전쟁이 끝날 무렵 폭격으로 집이 불타던 장면이 잔상으로 남아 있다.

조 주필은 정치보위부 기록물 발굴을 계기로 인천 근현대사 자료 연구가 조명받길 기대하고 있다. 그는 “핍박과 설움, 당혹감 속에서 질곡을 거쳤던 전쟁의 실상을 후손들에게 소상히 알려주는 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임무”라며 “인천시와 지역사회가 사료의 중요성을 깨달아 발굴하고, 수집하고, 연구하는 활동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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