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찮은 화력, 일본군경도 두려워하다

경기 적성군 경신리 출신으로 호는 의암
일찍이 군문에 투신해 정교로 근무하다
해산 후 낙향해 동장 근무하며 아동 가르쳐

광무황제 밀칙 받고 궐기한 이인영 의병장
13도창의군 이끌다 부친상으로 물러나자
원수부, 이은찬 지휘 아래 임진강 유역 이동
군사부·기존 지역 의병 부대와 연합하면서
윤인순 의진서 활약하다 좌군장으로 활동

휘하 부대 구식 화승총 아닌 서양총으로 무장
양주군 4개면에 군자금 징수 고시문 내기도
 

▲ 정용대 의병장이 태어난 곳인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경신리에 살고 있는 정 의병장 손자 정영화(오른쪽)님을 방문한 이우형 현강역사문화연구소장.
▲ 정용대 의병장이 태어난 곳인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경신리에 살고 있는 정 의병장 손자 정영화(오른쪽)님을 방문한 이우형 현강역사문화연구소장.

◆ 군대해산 후 낙향해서 아동 가르치며

1907년 7월19일 광무황제가 퇴위당하고, 이어 정미7조약으로 군대마저 해산되자 의병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개별적인 의병투쟁으로 일제를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관동의병장 이인영(李麟榮)은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해 함께 거의하여 일시에 통감부로 가서 담판하자는 통문을 전국 각지에 내게 되자 많은 의진에서 호응해 왔다. 그 후 광무황제로부터 비밀조칙을 받고 13도창의진을 구성하고 총대장에 추대된 이인영 의병장이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고 있던 그해 겨울, 경기도 적성군 남면(현 양주시 광적면) 경신리 출신 정용대(鄭用大, 1882~1910)는 인근 출신 윤인순(尹仁順, 1880~1909) 의진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누대에 걸쳐 그 지방에서 신망이 높았던 광주(光州) 정씨 양촌공파(陽村公派) 21세손으로 자는 중범(重凡), 호는 의암(毅庵)이었다. 그는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서 정교(正校)로 근무하다가 군대가 해산되자 귀향하여 동장을 하면서 아동들을 가르치고 있었음이 일제의 비밀기록에 나타나 있다.

“정용대(鄭容大:鄭用大라고도 함), 28세로 양반이다. 경기도 적성군 남면 경신동 출신으로 폭도(暴徒:의병-필자 주)가 되기 전에는 동장(洞長)으로 근무하며 부근의 아동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9권. 650쪽)

▲ 김연성·정용대 의병장이 양주군 일대 4개 면장에게 군자금 징수를 요청하는 고시문을 냈다는 기밀문서(<통감부문서>. '헌기 제561호').
▲ 김연성·정용대 의병장이 양주군 일대 4개 면장에게 군자금 징수를 요청하는 고시문을 냈다는 기밀문서(<통감부문서>. '헌기 제561호').
▲ 창의원수부 이은찬·윤인순정용대 의병장의 활약상이 나타나 있는 <폭도에 관한 편책>(1909. 02. 28.).
▲ 창의원수부 이은찬·윤인순정용대 의병장의 활약상이 나타나 있는 <폭도에 관한 편책>(1909. 02. 28.).

◆ 창의원수부 좌군장으로 활약

1907년 가을부터 관동의진을 이끌고 일본군과 38차례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고, 이어 13도창의진을 이끌면서 13차례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했던 이인영 의병장이 1908년 1월28일(음력 12월25일) 군사장(軍師長) 허위(許蔿)에게 '서울진공을 중지할 것을 48개 의진에 통고하라'는 명을 내린 후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향리로 향했다. 허위는 서울진공에 나섰던 13도창의진 48개 의진에 이를 통고하자 이들 의진은 주로 임진강 유역과 경기도 가평, 강원도 인제 등지로 나아가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임진강 유역에는 허위를 비롯하여 권중설(權重卨), 김수민(金秀敏), 김진묵(金溱默), 연기우(延基羽), 왕회종(王會鍾), 조인환(曺仁煥), 하상태(河相泰) 등이 이끄는 의진이 활약하게 되었고, 경기도 가평, 강원도 인제 방면으로 나아갔던 13도창의진 호서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과 그 휘하의 의진, 김연성(金演性), 성익현(成益顯), 정경태(鄭敬泰) 등이 이끈 의진은 본거지였던 강원과 경북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 관동의진 중군장과 13도창의진 직할대인 원수부(元帥府) 중군장을 맡았던 이은찬(李殷瓚)은 원수부 의진을 이끌고 임진강 유역으로 가서 그곳에서 활약하던 의진과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연합의진은 크게 '창의원수부(倡義元帥府)' 의진과 '창의군사부(倡義軍師府)' 의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전자는 이은찬이 이끌었고, 후자는 허위·김수민 중심의 부대로 1908년 6월 허위가 피체된 후에는 김수민·권중설, 하상태 등이 이끌었다.

창의원수부는 중군대장 이은찬, 선봉장 김귀손(金貴孫), 좌군장 정용대, 우군장 윤인순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에 앞서 정용대는 동향의 윤인순 의진에서 서기(참모)로서 활약하다가 2개월 후 창의원수부가 구성될 때 좌군장으로서 본격적인 의병투쟁에 나서게 된 것이며, 그 시기가 1908년 2월이었다.

“(정용대는) 지난해 봄 폭도수괴(의병장-필자 주) 윤인순과 모의하여 그의 서기 노릇을 약 2개월 동안 하고, 폭도수괴 이은찬과 합동하여 이(李)를 '창의원수부(倡義元帥府) 중군(中軍)'이라 하고, 윤(尹)을 우군(右軍)으로, 자신을 좌군(左軍)으로 삼아 행동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650쪽)

허위가 피체된 후 임진강 연합의진의 핵심은 창의원수부 의진이었는데, 그 의진의 좌군장을 맡은 정용대가 일제의 <폭도에 관한 편책>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2월7일 양주경찰서에서 일본 경찰 앞잡이 노릇을 하던 경부 김윤복이 내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松井茂)에게 보고한 문서에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번에 파견 명령을 받은 토벌대는 이달 2일 인천경찰서 순사 5명을 선착으로 하고, 5일 여주경찰서 순사의 도착에 의하여 비로소 토벌대 편성을 보고하기에 이르렀으나, 폭도의 무리는 지금 나뉘어져 이(李:이은찬-필자 주)·정(鄭:정용대-필자 주)·윤(尹:윤인순-필자 주)의 세 부대가 되어 이(李)는 부하 약 50명을 인솔하고 양주·포천군을, 윤(尹)은 약 20명을 인솔하고 양주·파주 방면을, 정(鄭)은 지난 4일 포천군 무림리 부근에서 의정부헌병대와 맞닥뜨려 교전 후 이(李)와 나뉘어 가평 혹은 영평 방면으로 도주한 풍설이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265쪽)

창의원수부 의진은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씩이었는데, 일본군경과 작은 전투를 벌일 때는 독자적으로 싸웠으나, 큰 전투를 벌일 때는 대부분 연합했던 것이 드러나 있다.

“2월25일 양주경찰서로부터 출발한 토벌대의 일행과 양주군 석적면에서 전투를 벌인 수괴 이은찬은 현재 부하 170명을 인솔하고 있는데, 그의 우군장 윤인순의 이름으로 별지 번역문과 같은 고시문을 각처에 게시하고 혹은 순사 주재소, 헌병 분견소에 발송하는 등 폭력적인 시위를 자행하고 있다.

3월2일 오전 6시30분 양주경찰서와 양주헌병분견소의 연합대는 양주군 회암면 귀율리에서 수괴 이은찬과 정용대가 인솔하는 약 80명의 폭도를 공격하였다. 교전한 지 30분만에 폭도들은 사망자 1명, 부상자 10명을 내고서 포천군 송우 방면으로 달아났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505~506쪽)

▲ 이은찬·정용대 연합의병 전투지 안내판. 경기 양주시 은현면 도하리 항동.
▲ 이은찬·정용대 연합의병 전투지 안내판. 경기 양주시 은현면 도하리 항동.

◆ 막강한 의진 이끌고 김연성 의진과 연합하다

일본군경도 창의원수부 의진을 쉽게 공격하지 못한 이유는 창의원수부 의진의 전력이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헌병대 기밀보고서 내용을 보면, 창의원수부 의진이 보유한 무기는 당시 주무기가 화승총이었던 여느 의진과 크게 달랐고, 특히 정용대 의진은 보유한 양총이 50정이라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일본군경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폭도수령(의병장-필자 주) 정용대
위의 자는 약 80명의 부하를 이끌고 목하 경기도 교하군 북면 지방을 횡행하며 금곡(金穀)을 약탈하고 있다고 함. 그리고 총기는 서양식 총 50정, 화승총 20정, 권총 4정, 군도 7자루를 휴대하고 복장은 상하 모두 다갈색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함.” (<통감부문서> 10권, '폭도수령 정용대 경기 교하 지방 무장 출몰 건')


“-. 폭도수령 이은찬
위 사람의 부하는 270여 명으로 총기는 5연발총 22정, 피스톨 6정, 기타는 여러 종류의 양총이며 화승총은 1정도 없다고 한다.

-. 동 윤인순
위 사람의 부하는 80여 명으로 5연발총 7정, 권총 5정, 기타는 양총이며 화승총은 없다고 한다.

-. 동 정용대
위 사람은 부하가 100여 명으로 5연발총 9정과 기타 여러 종류의 양총을 소지하고 있다고 한다.

명치 42년(1909) 2월 15일” (<통감부문서> 6권, '폭도수령 이은찬·윤인순·정용대 등 무장 출몰 건')

그리고 <통감부문서> 제6권 '헌기 제561호'(1909. 3. 15.)에 나타나 있는 헌병대 기밀문서를 보면, 김연성·정용대 두 의병장 이름으로 양주군 일대 4개 면장에게 군자금 징수를 요청하는 고시문을 낸 것이 나온다.

 

“폭도수령 김연성·정용대
위 두 사람의 이름으로 2~3일 전 양주군 이담면·어등산면·천천면·고주내면 4개면에 대개 아래와 같은 고시를 발했다고 한다.

“근래 우리가 일본 군대와 자주 교전하여 이 때문에 탄약이 결핍되고, 또 군자금을 소비했다. 그러므로 각 면장은 매호로부터 금 30전을 징수하여 오는 20일까지 우리 의군에게 가져와야 하며, 만약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에 따라 처분한다.” 운운하였다.”

이를 보면, 정용대 의진은 김연성 의진과도 연합해서 의병투쟁을 전개한 것을 알 수 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