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용사는 아직도 남북이 하나되는 꿈을 꾼다

22살 나이로 파병 자원 1년간 참전
1952년에 밟은 인천항 아직도 생생
“죽기 전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곳”

▲ 콜롬비아 참전용사였던 카를로스 호세 풀리도(90)씨가 한국전쟁 당시 촬영했던 사진(왼쪽). 카를로스 호세 풀리도(90)씨가 콜롬비아에서 한국전 참전당시 70년전과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콜롬비아 참전용사였던 카를로스 호세 풀리도(90)씨가 한국전쟁 당시 촬영했던 사진(왼쪽). 카를로스 호세 풀리도(90)씨가 콜롬비아에서 한국전 참전당시 70년전과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천에 도착했다.”

스물두 살의 콜롬비아 청년 카를로스 호세 풀리도는 군함 침대 위에서 안내방송을 들었다. 콜롬비아 북부, 카리브해와 맞닿은 카르타헤나 항구에서 배를 탄 지 한 달이 흐른 무렵이었다. 창밖으로는 한반도에 떠오르는 해가 보였다. 1952년 말, 인천항에 내려 밟은 땅은 전장이었다.

같은 바다, 같은 하늘을 61년 후 이십대 콜롬비아 청년이 가로질렀다. 펠리페 게레로 풀리도(34)는 2013년 유학차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로 한국에 온 그는 배를 타고 동일한 여정을 천천히 지나왔을 외할아버지를 떠올렸다.

16일 인천 서구 경명공원 콜롬비아군 참전기념비 앞에서 만난 펠리페는 “올해 4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어머니가 같이 인천에 오시려고 했는데,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일정이 취소됐다”고 아쉬워했다. 그의 외할아버지이자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카를로스는 “죽기 전에 한국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고 했다. 카를로스는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자동차로 1시간여 거리의 파초에 산다. 올해로 아흔 살이다.

콜롬비아는 한국전쟁 때 중남미에서 유일한 참전국이었다. 1951년부터 보병 1개 대대와 군함 1척을 파병했다. 국가보훈처가 2008년 펴낸 '6·25전쟁 콜롬비아군 참전사'를 보면 콜롬비아는 당시 전사 163명, 부상 448명, 행방불명 69명, 포로 30명 등의 희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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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의 나이에 군에 들어간 카를로스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파병을 자원했다고 한다. 인천을 거쳐 부대에 배치된 뒤로는 작전기록병으로 복무했다. 최전방에 투입돼 전파 망원경으로 정찰하는 임무도 맡았다. 감염병에 걸려 석 달 동안 일본 도쿄 병원에서 치료받기도 했다.

1953년 말 콜롬비아 대대에 다시 합류한 카를로스에겐 본국 복귀 명령이 내려진다. 한국 땅을 밟은 지 1년 만이었다. 한반도를 처음 마주했던 인천항에서 카를로스는 태평양을 횡단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카를로스는 수기에 “한국전쟁의 기억은 인생에 아주 중요한 의미로 남아 있다”고 썼다.

펠리페가 한국행을 선택하는 데에도 카를로스가 영향을 미쳤다. 펠리페는 “외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한국이 좋은 나라라며 꼭 가보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한국 정부의 해외 참전용사 후손 장학금으로 유학을 오는 기회도 얻었다. 지금은 인천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펠리페는 이날 외할아버지인 카를로스가 최근 콜롬비아 현지에서 찍은 영상을 보여줬다. 스물두 살의 청년은 7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백발이 성성해졌다. 꼿꼿한 자세만큼은 전쟁 당시 흑백사진과 차이가 없었다. 카를로스는 또렷한 목소리로 “남북이 한 나라가 되는 꿈을 꾼다”고 말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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