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君主)를 성인(聖人)으로 만들어 유교의 이상정치(理想政治)를 구현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경연(經筵)이었다. 원래는 한(漢)나라에서 황제에게 유교경전을 강의하던 관례에서 유래되었고, 이후 당(唐)나라를 거쳐 경연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송(宋)나라 때였으며 교재도 이때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이민족이 지배하던 원(元)나라 이후에는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어 그 기능이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고려 예종(睿宗, 1079~1122) 때 처음으로 도입되었으나 무신정권 때 폐지되는 등 활발하지 못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경연이 크게 진흥되었다. 경연은 조강(朝講)_주강(晝講)_석강(夕講) 등 하루에 세 번이었고, 때에 따라 임시로 소집되는 경연도 있었다.

학문에 뜻이 없고, 적성에 맞지 않는 임금은 경연에 참석하는 것이 지루하거나 한없이 곤욕스러웠을 것이다. 세조는 학문에 깊이는 있었으나 조카 단종을 폐위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연산군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경연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폐지되기도 했다. 경연은 절대 권력을 가진 임금을 신료들이 길들이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면 안된다는 주장을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이 되어버린 유교 경전에서 근거를 찾아 제시하면서 임금에게 성군이 되기를 강요했다.

이상적이긴 하지만 실제로 실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고 공허한 이론과 관념으로 임금을 옥죈 것이다. 당쟁이 심했을 때는 왕의 명령보다 자기가 속한 정파 영수의 말이 우선시되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경우 학문의 깊이나 자기주장이 약한 임금은 조정이 정파 간의 놀이터가 되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이 된다.

세종은 태자가 되자마자 두 달 만에 즉위(1418년, 22세)했으니 준비된 왕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20여년 동안 경연에 빠지지 않고 매번 참석했다. 그것도 하루에 세 번씩이나.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다.

당시 경연에서 주로 논의되었던 책은 송나라 때 유학자 진덕수(陳德秀, 1178~1235)가 당시 황제인 이종(理宗)을 위해서 저술한 방대한 <대학연의(大學衍義)>다. <대학연의>는 <사서삼경>, <춘추좌씨전>, <예기>, <논어>, <사기>, <한서>, <후한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 방대한 중국의 고전과 역사서를 풀어 임금과 백성이 바르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왕들은 주로 이 책을 가까이 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4)는 철저한 무인으로서 곁에 책을 두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대학연의>만큼은 학자들과 함께 강독하기를 즐겼다는 구절이 나온다.

또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은 17세에 과거에 급제할 만큼 학문에 대한 기초가 튼튼했고, 임금에 오른 첫해에 시독관(侍讀官) 김과(金科)와 함께 <대학연의>를 읽었다는 기록도 있다. 같은 해 12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이서(李舒, 1232~1410)가 사온 <대학연의>를 선물로 받고 기뻐했으며 “이 글을 다 읽으니 이제야 학문의 공(功)을 알겠다”며 흡족해 했다. 세종 1년 10월에 열린 첫 번째 경연에서도 <대학연의>를 채택했다.

두 번째 경연에서 경연을 책임지고 있는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이지강(李之剛, 1363~1427)이 세종에게 <대학연의>를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임금의 학문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근본이 됩니다. 마음이 바른 연후에야 백관이 바르게 되고 백관이 바른 연후에야 만민이 바르게 되는데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지는 오로지 이 책에 있습니다.” 세종이 <대학연의>를 독파하는 데 걸린 기간은 대략 4개월(세종실록 1년 2월) 정도인데 양녕대군은 세자 시절 <대학연의>를 독파하기까지 6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세종은 역사를 통해서 배우고 깨어나 신료를 바로세우고 백성을 사랑으로 이끌려고 했다.

세종은 경학(經學)이 정치의 원론을 제시한 학문이지만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교훈과 방법을 얻으려면 사학(史學)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깊게 배우면 정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밝게 증명되기 때문이었다. 세종이 사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집현전 유신들에게 사서(史書)를 읽도록 하겠다고 하니, 집현전 학자 윤회(尹淮, 1380~1436)가 사학(史學)보다는 경학(經學)이 우선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세종은 “지금의 유신들은 말로는 경학을 한다고 하나 이치를 궁극적으로 밝히고 마음을 바르게 가진 인사가 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세종은 역사에 밝은 대제학 변계랑(卞季良, 1369~1430)에게 명해 사학을 공부할 사람으로 정인지(鄭麟趾, 1396~1478), 고려에 귀화한 위구르 출신 설손(偰遜)의 손자 설순(偰循, ?~1435), 인동현감 김빈(金鑌, ?~1455) 등을 추천받아 수찬벼슬을 제수해 이들에게 역사서를 나누어 읽게 하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시켰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비롯해 많은 역사서를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읽기를 적극 권했다. 역사를 깊이 배우고 그 속에서 방법을 찾아 이상에 치우친 경학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