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왕실 제례문화의 산실
'조선왕릉' 풍수지리 영향받아
아름다운 경치 힐링

광릉·사릉·성묘·휘경원 등
모여있는 왕과 왕비 무덤엔
그 시대별 양식 잘 드러나
둘러보는 재미 쏠쏠

위대한 유산, '조선왕릉'은 600년을 이어온 왕실 제례 문화의 산실이다. 왕의 무덤은 배산임수 등 여러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능(陵)에는 오랜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내는 예술 조형품들과 풍수이론 등이 숨어있다. 풍수가 좋은 남양주시에는 여러 왕과 왕후의 무덤이 자리한다.
 


#조선시대 최초 수렴청정 '광릉'

[사적 제197호]
소재지:남양주시 광릉수목원로 354(진접읍,광릉)
지정일:1970년 5월26일

광릉은 조선 7대 대왕인 세조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형인 문종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계유정란을 일으킨 후에 1455년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세조는 군제 개편·집현전 폐지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토지제도 정비·서적간행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6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 윤씨는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했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왕대비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당시 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사를 돌보게 된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14년(1483)에 세상을 떠났다.

왕의 유언에 따라 무덤방은 돌방을 만드는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못하게 했다. 돌방과 병석을 없앰으로 백성의 고통과 국가에서 쓰는 돈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무덤 주위에는 난간석을 세우고 그 밖으로 문석인·무석인·상석·망주석·호석·양석을 세웠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의 구 영릉이 조선 전기 왕릉 제도를 총정리한 것이라면, 광릉은 조선 전기 왕릉 제도의 일대변화를 이룬 조선 왕릉 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비운의 왕, 비운의 국모 '홍릉과 유릉'

[사적 제207호]
소재지: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금곡동)
지정일:1970년 5월26일

홍릉은 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 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해 고종의 무덤에 합장했다. 광무 원년(1897) 대한제국 선포로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와 조선왕릉의 제도를 결합했다.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난간 밖으로 둘레돌과 양석을 세우지 않았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에 앞면 5칸·옆면 4칸의 침방이 있는 집 즉, 침전을 세웠으며 문·무석인과 기린·코끼리·사자·낙타 등의 수석을 놓았다. 문·무석인은 크고 전통적인 기법으로 조각됐다.

유릉은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릉 중 한 봉우리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 뿐이다. 홍릉과 유릉은 철종 이전의 무덤과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 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가 달라졌다. 2개의 무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외곽으로 담장을 설치했으며, 양릉 사이에 돌로 만든 연못을 뒀다.
 


#굽히지 않는 지조 '사릉'

[사적 제209호]
소재지: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사능리)
지정일:1970년 5월26일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하지 않았고, 무덤 앞에 상석과 양석, 둘레돌이 있으며 그 밖으로 3면을 낮은 담으로 쌓았다. 단종의 무덤이 장릉으로 봉해졌을 때에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동물모양의 돌만 세웠는데 이는 왕릉으로 봉해진 것에 대한 예에 따른 것이다. 사각지붕 모양의 장명등은 장릉과 같은 것으로 숙종대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능의 소나무가 동쪽 방향으로 굽는다는 전설이 있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광해군묘'

[사적 제363호]
소재지: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9
지정일:1991년10월25일

조선 15대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류씨의 무덤이다. 광해군은 14대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아들로, 1608년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동안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 복구사업에 전념했고,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다시 편찬했다. 또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해 민생안정에 힘을 썼으며, 당시 명나라와 후금(청)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외교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서궁에 유폐하는 등의 일로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폐위됐다. 폐위 후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에 유배됐다. 문성군부인 류씨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비에서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쌍분의 형태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광해군, 오른쪽이 문성군부인의 묘이다. 묘의 상설은 왕자묘제의 형태로 문석인, 장명등, 망주석, 묘표석 등을 배치했다.
 


#권력의 풍파 '성묘'

[사적 제365호]
소재지: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5
지정일:1991년 10월25일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이자 15대 광해군의 사친(생모)인 공빈 김씨의 무덤이다. 공빈 김씨는 1553년(명종 8)에 태어나 선조의 후궁이 되어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으나 1577년(선조 10)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고 능호를 성릉(成陵)이라 하였으며,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다시 공빈으로 강등(降等)되고 지금의 성묘가 됐다.

묘소는 성릉으로 추봉할 때 왕릉의 격에 맞게 석물을 다시 조성한 것으로,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혼유석, 난간석 등이 남아 있다.
 


#휘경원

[사적 제360호]
소재지: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67번지 외
지정일:1991년 10월25일

조선 22대 정조의 후궁이자 23대 순조의 사친(생모)인 유비 박씨의 무덤이다.
 


#순강원

[사적 제356호]
소재지:남양주시 진접읍 내각2로 84-31, 외(내각리)
지정일:1991년 10월25일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이자 추존 원종의 사친(생모)인 인빈 김씨의 무덤이다.
 


#영빈묘

[사적 제367호]
소재지: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175번지
지정일:1991년 10월25일

조선 19대 숙종(재위 1674∼1720)의 후궁인 영빈 김씨(1669~1735)의 무덤이다.
 


#안빈묘

[사적 제366호]
소재지: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 66
지정일:1991년 10월25일

조선 17대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의 무덤이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자료·사진제공=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