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적의 노복 돼 의병에 창끝 겨눈 이들 꾸짖다

 

 

 

 

 

▲ 1. 1894년 7월23일(음력 6월21일) 일본군 혼성여단 5000여 명을 이끌고 경북궁을 쳐들어온 일본군 육군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원 표시). 그의 딸이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할머니이다.

 

 

일제 1894년 7월23일 청일전쟁 목전 경복궁 점령

국왕·흥선대원군 궐기 호소에 유림·동학군 호응

'전기의병' 을미사변 이후 '국수보복' 기치로 확산

'후기의병'은 서울진공작전 이후 지역 중심 활약

 

1907년 광무황제 강제퇴위·군대 해산에 봉기

경기 양주서 자체 의진 이끌다 창의원수부 합류

이듬해 파주에 진무영대장 명의 납세 저항 격문

이후 우군장으로 순검·보조원 대상 귀순 촉구도

▲ 2. 윤인순 의병장이 순검(순사)와 보조원에게 보낸 고시문. (<통감부문서> 6권. 1909. 03. 03.)
▲ 2. 윤인순 의병장이 순검(순사)와 보조원에게 보낸 고시문. (<통감부문서> 6권. 1909. 03. 03.)

 

◆ '한말의병(韓末義兵)'이란 용어의 모호함

필자는 가끔 '한말의병을 연구하셨다고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런 경우 참으로 난감하다.

'한말의병'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풀이하면 '대한 말기 의병'이란 뜻이 된다.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꾼 것이 1897년 10월13일이니, 1894년부터 1896년 사이에 일어난 의병을 '조말의병(朝末義兵)'이라 해야 하는가? 더구나 을사늑약 전후부터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의병들은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외쳤으니, '국권 회복기 의병'이라 칭하는 것은 이 시기에 국한된 것이다. 따라서 전·후기 의병을 아우를 수 있는 용어는 '일제침략기(일본제국의 침략기) 의병'이 가장 적절한 용어가 될 것이다.

1894년 7월23일(음력 6월21일), 일제가 일본군 5000여 명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의 국왕과 왕비를 감금한 가운데 그들 앞잡이 내각을 세워 청일전쟁에서 청국에 인적·물적 자원은커녕, 매매도 하지 못하게 하는 비밀조약을 체결하여 마침내 청국은 패배하였다. 그 후에도 일본군이 궁궐을 에워싼 상황이 지속되자, 국왕과 흥선대원군은 비밀리 영호남에 사람을 보내어 의병을 모아 궁궐로 오게 하였으니,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국왕이 보낸 밀사 전 승지 이용호(李容鎬)가 당시 경북 안동지역 유림의 대표격이던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를 찾아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전하자 의병이 크게 일어났는데, 이에 앞서 공주 유생 서상철(徐相轍)이 '임금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으니,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는 포고문을 향산에게 보내 의병 거의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호남지역에는 흥선대원군이 보낸 사람들이 동학지도자 전봉준(全琫準)과 김개남(金開南)에게 달려간 것이 일제의 비밀기록에 나온다. 전봉준은 전주·김제·금구 중심의 동학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여 급히 동학군 1만여 명을 모아 금구 대접주 김덕명(金德明)을 선발대로 보내고, 이어 2만여 명을 이끌고 전봉준이 나섰지만, 김개남은 밀사를 간자(間者)라 여겨 목을 베고, 전봉준보다 1개월 뒤에 금산을 거쳐 청주로 향하였다. 2차 동학농민군은 1차 동학농민군과 달리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일어난 것이지, 지방 관아를 점령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기에 의병으로 보아야 함이다.

청일전쟁에서 엄청난 배상을 받기로 했던 시모노세키 조약도 삼국간섭으로 무산된 것을 본 조선 정부는 등거리 외교를 펼치자 왕비를 참살하여 그들 침략에 걸림돌이 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는데, '국수보북(國讐報復 나라의 원수를 갚자)'의 기치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 시기(1894~1896)의 의병을 전기의병이라 일컫는다.

 

▲ 3. 윤인순·이은찬·정용대 연합의진에 관한 양주경찰서장의 전화 보고서. (<폭도에 관한 편책>. 1909. 02. 28.)
▲ 3. 윤인순·이은찬·정용대 연합의진에 관한 양주경찰서장의 전화 보고서. (<폭도에 관한 편책>. 1909. 02. 28.)

 

◆ 경기 북부지역에서 의병투쟁 벌이다

일제침략기 경기도 전기의병은 크게 경기 중·서부 지역 의병과 경기 북·동부 지역 의병이 있었다. 전자는 광주·안성·여주·이천 지역 의병으로 남한산성을 점령한 것과 강원도 강릉을 점령하고 관동대진을 형성하여 원산진공을 펼쳤고, 후자는 지평(현 양평군 속면) 의병들이 원주로 가서 집결하고, 이어 제천·단양 등지로 나아가서 호좌의진을 결성하여 충주성을 점령한 의병이고, 가평의병은 강원도 춘천의병과 더불어 춘천관찰사를 처단하고 대규모 관군과 싸웠다.

후기의병은 13도창의진을 결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펼치기 전후의 상황으로 나눌 수 있는데, 1907년 9월 이후 전국에서 모여든 48개 의진 1만여 명은 38차례 의병투쟁을 전개한 이듬해 1월28일,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부음을 듣고 군사장(軍師將) 허위로 하여금 각 의진에 서울진공을 중지할 것을 명하고 귀향하자, 전국에서 모여든 의진은 2월부터 각 지역으로 돌아갔다. 대표적인 의병장의 경우만 살펴보면, 군사장 허위·안무장 김수민·대대장 연기우 등은 경기도 북부지역으로, 교남의병대장 박정빈은 황해도 해주·평산 지역으로, 호서창의대장 이강년은 가평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가 강원도를 거쳐 경북지역으로 나아갔다.

경기도 양주군 남면 구암리 출신 윤인순은 농업에 종사하다가 일제에 의해 광무황제가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양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독자적인 의진을 형성하여 양주 석치(石峙)에서 일본군경과 접전을 벌였다고 하지만, 그가 의병장으로서 일제 비밀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에 등장하기로는 1908년 10월이었다.

 

“10월2일 밤 비수(匪首:의병장-필자 주) 윤인순의 부하 약 30명(각 총기 휴대)은 파주군 파평면 천천리(泉川里:현 적성면 속리-필자 주)에 침입, 동리 성낙일이란 자를 동군 천현면 진천리(眞川里:현 법원읍-필자 주) 양씨 마을로 납치해갔으므로 그 사람의 친척 성낙용은 40원을 적도(賊徒:의병-필자 주)에게 전달하고 겨우 성낙일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적도는 이미 도주, 종적을 알 수 없었는데, 문산주재소로부터 보고가 있었다.” (국가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163쪽)

 

11월13일에는 포천군 가산면의 면장과 이장들을 가산면 정교리(鼎橋里)오게 하고 윤인순은 이은찬·김교성 의병장과 의병 50여 명을 이끌고 가서 군자금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달 13일 오전 10시경, 적괴(賊魁:의병장-필자 주) 이은찬, 김교성, 윤인순 등 3명은 혼성의 부하 약 50명을 인솔하고 포천군 가산면 승교리(昇橋里:정교리 오기-필자 주)에 내습하였다. 적도(賊徒)는 동 면장과 각 이장을 초래(招來)하고, “군용금을 제공하라! 만약 지체한다면 살해한다.” 라고, 협박하며 그들을 억류하였다. 각 마을 사람들은 면·이장을 구출하고자 하여 각호로부터 빈부에 응하여 현금 80원 10전을 모금하여 소임(所任:마을소사) 등이 이를 휴대하고 이튿날 오전 10시 적도를 만나 겨우 면·이장을 구출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424~425쪽)

 

이어 11월14일 윤인순 의병장은 30여 명의 의진을 이끌고 파주군 천현면 오리동(五里洞)으로 나아가 문산분견소 헌병들과 교전을 벌여 위력을 과시하였다.

▲ 4. 창의원수부 의진이 포천군 가산면 면장과 이장을 오게 하여 군용금 제공을 요청함(<폭도에 관한 편책>. 1908. 11. 19.)
▲ 4. 창의원수부 의진이 포천군 가산면 면장과 이장을 오게 하여 군용금 제공을 요청함(<폭도에 관한 편책>. 1908. 11. 19.)

 

◆ 창의원수부 진무영대장(鎭撫營大將)·우군장(右軍將)이 되어

그 후 연기우 의진과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했는데, 연기우 의병장은 강화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크게 활약하고, 13도창의진 대대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두 의병장의 격문이 파주군 광탄면에서 발견되었다.

'영 파주 광탄면 이장 및 대소민인'은 1908년 9월 창의원수부 진무영대장(倡義元帥府鎭撫營大將) 윤(尹)으로 된 것과 10월1일자 '영 파주 동면 면장처 광탄도집강소' 격문은 조선존양대장(朝鮮尊攘大將) 연(延)의 이름으로 된 것이었는데, 두 격문의 공통점은 일제에 세금을 내지 말고, 그것을 의병 군자금으로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 순검(순사)과 순사보조원에게 창의원수부 우군장 윤인순이라고 이름을 당당히 밝힌 격문이 나붙었다.

 

“고시(告示) 순검·보조원(순검에게는 한문, 보조원에게는 국문)

모름지기 우리 국민이란 자는 도적의 무리를 소탕하고 고국을 위험으로부터 구하고, 민복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는가? 꿈틀대는 벌레들도 도를 잘 분별하고, 짐승 역시 주인의 원수를 잘 안다. 하물며 사람으로서 외적이 원수가 됨을 모르는 자가 있을 것인가? 너희들은 심사숙고하라.

너희들은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너희들의 마음에 부끄러운 바가 없는가? 국민으로서 어찌 이러한 경우를 달게 받을 것인가? 너희들의 삶을 향유하게 하는 나라 너희들의 조상을 묻은 토지를 망각하고 너희들은 유독 봉록을 위하여 그 자신을 팔고 정의에 반하여 도적의 노복이 되어 창을 들고서 우리를 토벌하는 자는 너희들이 아니고 누구냐? (중략)

너희들은 잘못을 깨달아서 정의에 대하여 함께 나아가 각각 적을 베고 그 우두머리를 붙잡아 바친다면 그 죄를 면할 뿐만 아니라 또한 상을 크게 하고, 또 군기·탄약을 지참하면 상을 줄 것이고, 기밀을 탐지하여 가져오면 그 죄를 면하고 용서할 것이다. (후략)

기유년 2월

창의원수부 우군장 윤인순

 

* 적의 우두머리를 벤 자 1명에 대하여 : 2만 냥

* 군기·탄약을 지참한 자 1명에 대하여 : 1만 냥

* 임시 기밀을 탐지하여 가지고 온 자 : 5000 냥”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291~292쪽)

 

결국 순사나 순사보조원으로 일본 경찰에 참여하여 의병 진압을 하는 데 앞잡이 노릇을 하던 한인에게 잘못을 깨닫고, 적을 베거나 무기와 기밀을 제공하는 자에게 후한 상금을 주겠다는 고시문이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